지식과 정보를 대하는 평생학습의 태도

2024-01-02

[칼럼] 편집위원 채희태


청룡의 해라는 갑진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에 소개될 이 글은 사실 새해를 맞이하기 전에 쓴 글입니다. 천지라도 개벽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지만, 새해가 시작된다는 것은 그저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하루는 여느 하루와 달리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참 많은 것들을 바꾸어 놓습니다.


가수 이용은 노래 <잊혀진 계절>을 통해 10월의 마지막 밤을 매우 특별한 날로 만들었습니다만, 따져보면 특별하지 않은 날은 단 하루도 없습니다. 모든 하루가 특별하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모든 하루가 지극히 평범하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제가 새해를 이렇게 시큰둥하게 시작하는 이유 중 하나는 해가 바뀌는 것이 저에게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해가 바뀌면 학년이 바뀌거나 초·중·고로 학교가 바뀌었고, 그 변화를 설날 받는 세뱃돈의 많고 적음으로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떡국을 먹어야 한 살을 먹는다는 어른들의 말을 듣고 하루라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떡국을 두, 세 그릇씩 먹었던 기억도 납니다. 어쩌면 그때 익숙해진 관성이 20대로 이어지고, 직장 생활로 이어지며 누구나 새해가 시작되는 하루를 더 특별하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해가 바뀌는 것이 일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침에도 불구하고 만약 저처럼 새해의 시작이 이전처럼 설레지 않거나, 특별함이 옅어졌다면 그 이유는 집단의 가치보다 개인의 가치가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학교 다닐 때 수학 시간에 가장 먼저 집합을 배웠습니다. 집합의 사전적 정의는 ‘특정 조건에 맞는 원소들의 모임’입니다. 집단이 되려면 먼저 집단을 구성할 수 있는 조건, 즉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집단이 해체되고 개인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정보가 너무 많아지다 보니 집단을 이루는 기준마저 모호해졌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부족한 개인으로 이루어진 집단이 가지고 있는 효율성을 극대화해 문명을 개척해 왔습니다. 하지만 집단의 가치는 때때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했을 뿐 아니라, 빅뱅 수준으로 팽창하고 있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데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문명의 발달 과정에서 생성되고 진화해 온 철학과 사상은 모두 개인이 아닌 집단의 편이었습니다. 선(善)의 그리스 어원은 이익이 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 아가톤(Agathon)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그 이익은 개인이 아닌 집단의 이익이었을 것입니다. 집단의 이익을 추구했던 인류의 가치는 19세기 공리주의를 주창했던 벤담(Jeremy Bentham)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말로 정점을 찍었습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조금 비틀어 보면 ‘집단이 모두는 아니라는 것’을 최초로 인정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지배와 피지배,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더 많이 가진 자와 덜 가진 자가 엄연히 구조로 존재하는 계급 사회에서 집단은 모두가 아닌 집단을 내세워 이익을 취하는 특정 계급이었을 테니까요. 어쩌면 공리주의는 성난 민중들에게 집단이 모두가 아니라는 사실을 들키자, 다수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명분이라도 내세우기 위해 시작된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지켜졌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라는 ‘토마스 프랭크(Thomas Frank)’의 질문처럼 신자유주의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되어버린 부의 양극화는 지금까지 다수의 민중이 공리주의라는 껍데기에 속아 소수의 이익을 위해 투표해 온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넘쳐나는 정보를 간편하게 습득하며 한껏 스마트해진 개개인들이 더 이상 집단의 선도, 최대 다수의 행복도 믿지 않게 되면서 마침내 개인의 약진이 시작되었습니다.



머리 아프시죠? 새해부터 너무 멀리 왔네요. 그렇다면 평생학습은 집단의 기준이 개인으로 이동하고 있는 이 시대에 정보, 그리고 정보의 습득을 통해 축적되는 지식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평생교육이 학령기 교육을 품고 있는 교육 선진국과 다르게 학령기 교육과 기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대한민국에선 지식과 정보를 이해가 아닌, 정복의 대상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합니다. 방대한 지식과 정보를 정복해야 입시 경쟁에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학생들이 준비하고 있는 수능은 단지 교과서만 정복한다고 잘 볼 수 있는 시험이 아닙니다. 심지어 국어 문제에 수학을 잘해야 풀 수 있는 지문이 등장하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지식과 정보를 정복하기 위해 달려들지만, 오히려 지식과 정보의 포로가 되는 경험을 합니다. 그리고 그 패배감은 이후 지식과 정보를 두려워하고, 배척하는 학습의 태도로 굳어집니다. 


지금은 고정된 10개 중에서 누가 더 많이 아느냐가 중요한 시대가 아닙니다. 무한대로 증가하고 있는 지식과 정보 속에서 내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한 시대입니다. 만약 지식과 정보를 정복이 아닌 이해의 대상으로 여길 수만 있다면, 모르는 것을 그렇게까지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전엔 모르는 것을 들키거나, 인정하는 것이 매우 부끄럽고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말이 생겨났는지도 모릅니다. 모르는 것을 숨기고 있으면 순간의 부끄러움은 모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만큼 무지의 늪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부끄러운 것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거나 숨기는 것입니다.


저는 더 많이 알고 싶어서 40이 훌쩍 넘은 나이에 사회학 공부를 시작했지만, 석사학위를 받으며 깨달은 건 더 많이 알게 된 자신이 아니라 스스로 얼마나 무지한지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물에서 나오려면 먼저 물에 빠졌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듯이 스스로 무지를 인지하고 인정할 수 있어야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교육은 타자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정보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반면 학습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정보의 세상을 조금씩 넓혀 가는 것입니다. 아무런 감흥 없이 시작된 갑진년 새해, 지식과 정보 앞에 기죽지 말고, 무지를 당당히 인정하는 평생학습의 태도를 가져보면 어떨까요? 나이와 성(性)과 신념을 떠나 내가 모르는 걸 알고 있는 누군가를 스승으로 모시고, 또 내가 알고 있는 걸 모르는 누군가를 사랑스러운 제자로 여기면서 말입니다.



글 채희태

- 낭만백수를 꿈꾸는 프리랜서, 콘텐츠, 정책 기획자

- [백수가 과로에 시달리는 이유] 저자

- 공주대학교에서 평생교육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공동웹진 with 국가평생교육진흥원전국시도평생교육진흥원협의회

전화번호 : 070-4128-3958  이메일 : eeum.official2023@gmail.com


ⓒ 2022-2023 평생학습이음 SITE BY 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