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교육, 교육의 전제를 뒤집자! | 편집위원 채희태

2024-02-06

전제(前提)란 무엇일까? 교육의 전제를 뒤집기 위해 먼저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전제’의 뜻을 살펴보았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전제를 다음 두 가지로 정의해 놓고 있다.



1. 어떠한 사물이나 현상을 이루기 위하여 먼저 내세우는 것.

2. 『철학』 추리를 할 때, 결론의 기초가 되는 판단. 삼단 논법에서는 대전제, 소전제를 구별한다.





쉽게 풀어 이야기하면 전제는 굳이 논쟁할 필요가 없는, 이미 암묵적으로 합의된 명제라고 할 수 있다. 전제는 일상적인 소통을 할 때도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부모와 자녀 간의 대화가 쉽지 않은 이유는 서로 전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부모는 주로 자녀가 하지 못한 경험을 전제로 이야기하는 반면, 자녀는 부모에 비해 빈약한 경험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가족의 범주 안에서 펼쳐지는 이러한 불통이 사회적으로 일반화된 것이 바로 세대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인보다 작가로 호평을 받고 있는 유시민은 한 TV 토론회에서 이 시대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586을 향해 매우 고약한 세대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과거 586의 부모 세대들은 보통 자식이 어떤 일을 상의해 오면 으레, “내가 뭘 알겠니, 네가 잘 알지. 네 말대로 하렴”이라고 답을 했지만, 부모가 된 지금의 586세대들은 자식들한테 이렇게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네가 뭘 안다고 그래!”


범위를 가족 밖으로 넓혀 보자. TV를 통해 흔히 접하게 되는 진보와 보수의 토론을 보고 있으면 우리는 동치미 없이 고구마를 먹는 경험을 하곤 한다. 같은 사회문제에 대해 일반적으로 진보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주장을 펼치지만, 보수는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다”라는 전제를 고수한다. 


전제가 다르니 건강한 토론이 될 리 만무하다. 토론을 하기 전에 전제에 대한 합의를 먼저 시도하거나, 그게 어려우면 서로가 가진 전제에 집착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쓴다면 보다 건강한 토론이 가능하지 않을까?


교육이 갈수록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도 사람마다, 또는 자신이 처한 입장에 따라 교육에 대한 다른 전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교육의 수혜를 입은 사람뿐만 아니라, 교육을 통해 불행의 늪을 허우적거리는 사람들도 이 시대를 관통하고 있는 교육의 전제에 대해 추호도 의심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교육은 대부분의 국민들을 만족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불행으로 내몰고 있는 선발을 교육의 당연한 전제로 여긴다.


교육을 통한 선발시스템은 사실 근대의 발명품이다. 선발은 혈통으로 지위가 계승되던 중세 교육의 전제를 무너뜨리는데 매우 크게 기여했다. 근대 이전의 교육은 선발이 아닌 사회화의 도구였다. 지배계급은 주로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피지배계급은 지배계급의 탄압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교육을 사용했다. 


정도전이 고려의 권문세족을 무너뜨리고 신진 사대부가 중심이 되는 조선을 건국한 것도 서자로 태어난 자신의 혈통으로는 계급의 단단한 벽을 넘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에도 엄연히 계급은 존재했지만, 과거시험을 통한 계급 상승이 가능했으며 신분이 낮은 평민이 과거에 급제한 비율도 40%에 육박했다. 


*조선 초기와 중기의 경우 평민 등 신분이 낮은 급제자가 전체 급제자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태조∼정종(40%), 태종(50%), 세종(33%), 문종∼단종(34%), 세조(30%), 예종∼성종(22%), 연산군(17%), 중종(20%), 명종(19%), 선조(16%) 등이었다. 하지만 인조이후에는 숙종(20%), 경종(34%), 영조(37%), 정조(53%) 고종(58%)까지 올라갔다. 특히 이 가운데에는 영의정의 자리에 오른 사람도 있고 판서가 된 사람은 부지기수였다(한영우(2015). <과거 출세의 사다리>. 지식산업사).

 

 내용적으로 보면 선발시스템이 가동된 근대교육은 우리나라가 서구보다 약 3~400년 앞섰다고 할 수 있다.


교육의 전제를 뒤집기 위해 쓰고 있는 이 글은 언젠가부터 교육의 모든 것이 되어버린 선발이 절대적으로 악하기만 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선발 이전에 교육의 중심축을 담당했던 사회화(성장)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말자는 것이다. 자유와 평등의 균형이 인류의 영원한 숙제이듯, 선발과 성장의 균형은 근대 이후의 교육에 주어진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교육을 통한 선발이 사회의 관점으로 개개인을 바라본다면, 성장은 개개인이 교육을 통해 사회적 가치에 다가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선발이 교육의 전제로 작동하는 선발의 과잉은 교육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아비투스(문화 권력)가 되었다. 중앙정부의 기준으로 예산을 지원할 지방정부를 선정하는 공모사업이나, 상부 기관의 관점으로 현장의 최전선에 있는 하부 기관을 평가하거나, 심지어 감사를 하는 많은 일들은 대부분 선발에서 비롯된 관행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서울시교육청에서 근무할 때 교육청의 지시를 받아 현장에서 교육복지 업무를 맡고 있는 한 센터를 방문한 적이 있다. 방문의 목적은 기관의 1년 사업을 평가하기 위함이었고, 센터 종사자들은 하나같이 매우 경직된 자세로 1년 동안 해 왔던 일들을 조심스럽게 발표했다. 평가의 전제에 동의하지 않았던 필자는 같이 갔던 교육청 관계자에게 울먹이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아니, 현장에서 이렇게 고생들을 하는데, 우리가 이들을 평가할 자격이 있나요?”


학령기 교육이 주로 선발을 중심으로 작동한다면, 평생교육은 학령기 교육이 놓치고 있는 성장에 무게중심을 둘 필요가 있다. 교육의 전제는 선발만 있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성장만 주장할 수도 없다. 평생교육이 교육의 오랜 축이었던 성장의 가치를 제대로 살필 수만 있다면, 많은 사람들을 상대적 불행으로 내몰고 있는 교육의 전제도 조금씩 뒤집을 수 있지 않을까?




글 채희태

- 낭만백수를 꿈꾸는 프리랜서, 콘텐츠, 정책 기획자

- [백수가 과로에 시달리는 이유] 저자

- 공주대학교에서 평생교육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공동웹진 with 국가평생교육진흥원전국시도평생교육진흥원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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