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교육, 어디까지 상상해 봤니?

2022-12-27


[칼럼] 채희태 편집위원





서울 모 구청의 정책보좌관이었던 시절, 한번은 구청장의 지시사항을 이행하기 위해 실무부서를 찾아 전화를 한 적이 있었다. 한참 내 말을 듣고 있던 담당부서 공무원은 그 일은 자기 부서 일이 아니라면서 다른 부서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어, 그 공무원이 알려준 부서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그 곳에서도 자기 부서 업무가 아니니 처음에 전화 걸었던 그 부서로 연락을 해 보라는 것이 아닌가! 


공무원의 이러한 행위를 전문 용어로 ‘핑퐁’이라고 부른다. 공무원들은 마치 반대편 테이블로 탁구공을 넘기듯 100% 순도의 자기 일이 아니면 다른 부서로 미루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심지어 구청장의 지시도 이렇게 핑퐁을 치는데, 주민들의 민원을 대할 때는 오죽할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업무와 책임의 선이 법으로 규정되어 있는 공무원의 한계를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 사회, 특히 공공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 사회는 책임을 중심으로 단단하게 구조화되어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몰이해의 책임을 일방적으로 공무원에게 전가하지는 말자. 우리 또한 무슨 사고가 터지면 제일 먼저 책임질 사람부터 찾지 않는가! 복잡해질대로 복잡해진 우리 사회의 책임은 어쩌면 단단한 구족 속으로 꼭꼭 숨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다른 업무로 상의를 하러 온 평생교육팀장에게 그 일에 대해 하소연을 했다. 평생교육팀장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 업무, 그냥 우리팀에서 할게요.”

“예? 그게 평생교육팀 업무였나요?”

“그건 아니지만… 평생교육은 뭐든 해도 되고, 또 뭐든 안 해도 되거든요.”


공무원이 지켜야 할 업무의 경계를 가볍게 넘나들던 그 팀장은 서열의 경계마저 훌쩍 뛰어넘어 일찌감치 국장을 달았다.


인간의 모든 사유는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라고 믿었던 시절(대충 고대에서 중세를 이른다)에는 역설적으로 상상계(想像界, imaginaire)가 큰 힘을 발휘했다. 반대로 근대에 접어들며 눈에 보이는 것이 차고 넘치기 시작하자 유물론이 위세를 떨치기 시작한다. 한 인간의 성장 과정이 그렇듯, 충분한 경험이 동반되지 않는 사유는 늘 극에서 극으로 요동치기 마련이다. 인류의 문명사 또한 다르지 않다. 상상계에 바탕을 둔 관념론과 관념론과 각을 세웠던 유물론은 한때, 아니 지금까지도 서로에 대한 몰이해 속에서 각자의 찻잔 속에서만 열심히 회오리를 만들어 낸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이야기했던 故 리영희 교수의 말처럼 정작 중요한 건 균형을 잡는 일이다. 그 유명한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무의식의 세계를 최초로 발굴해 냄으로써, 중세의 터널을  빠져나와 신으로부터 해방은 되었으나 오로지 이성만을 쫓다가 길을 잃은 인간에게 절대이성과 유물론의 반대편에 있는 ‘무의식과 상상(想像)’이라는 균형추를 선물했다.



무의미해 보이는 꿈조차 의미로 가득 차 있다. 

꿈을 해석한다는 것은 그 의미를 삶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다.

<프로이트 『꿈의 해석』에 등장하는 첫 번째 구절>



우리는 전문성이 만든 단단한 경계와 책임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사회 속에서 상상하는 법을 까맣게 잊었는지도 모른다. 현재 인류가 누리고 있는 과학 문명은 대부분 과거의 상상에서 비롯되었다. 상상하는데는 돈이 들지 않는다. 동시에 상상은 상상만 해도 무시무시한 책임도 따르지 않는다. 상상은 인간이 답답한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은 국장으로 승진한 모구청의 평생교육팀장이 했던 말처럼 한번 상상해 보기로 했다. 평생교육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첫째, 평생교육의 포시셔닝

현재 평생교육이 위치해 있는 곳을 알지 못하면 방향도 정할 수 없다. 어느덧 자동차의 필수품이 되어 버린 네비게이션도 현재 내가 위치해 있는 곳을 알아야 가고자 하는 방향을 일러줄 수 있다. 전통적으로 교육은 교수자와 학습자라는 경계를 만들어 낸다. 교육이 만든 경계는 교수자는 전능하며 학습자는 미숙한 존재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사회의 변화가 크지 않았던 농경시대에는 어른의 축적된 경험을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였지만, 지금은 그 양을 가늠할 수도 없는 새로운 정보가 교육 밖에서 생성되어 팽창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경계는 보통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는 구심력과 현재의 상태를 벗어나려고 하는 원심력이 균형을 이루는 지점에 형성된다. 그런 관점에서 교육은 구심력과 원심력의 힘이 만나 그리는 원 안의 세계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평생교육는 어디에 위치해야 할까?

평생교육은 모든 시민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가는 과정을 담는다. 그렇기 때문에 평생교육은 교육학과 사회학의 접점에 위치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사회학은 불확실하게 변화하는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반면 교육학은 변화하는 사회와 무관하게 끊임없이 교육이 정한 기준을 제시한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교육사회학이지만, 무릇 교육사회학은 학문의 뿌리가 교육학이냐, 사회학이냐에 따라 정반대의 논리 구조를 갖는다. 사회학에 뿌리를 둔 교육사회학이 교육에게 교육의 사회적 쓸모를 묻는 학문이라면, 교육학에 뿌리를 둔 교육사회학은 주로 비교육적이라 판단되는 사회의 요구로부터 교육을 지키기 위해 작동한다.



둘째, 마을교육공동체와 평생교육

우리는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말을 입이 부르트도록 이야기하고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듣는다. 그 당연한 말에 모두 고개만 끄덕일 것이 아니라 그 말속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오징어처럼 끈질기게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그 말이 그런 의미는 아니겠지만, 난 한 아이를 키우는데 마을 하나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인간은 모두 하나의 우주다. 우주의 끝을 알 수 없듯, 우리는 한 명의 아이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의 끝을 가늠하지 못한다. 



사과 속에 들어 있는 씨앗은 셀 수 있지만,

씨앗 속에 들어 있는 사과는 셀 수 없다.

<켄 키지>




한 아이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은 경계를 특정할 수 있는 마을이 아니라 무한대의 우주를 뛰어넘는다. 혹시라도 마을교육공동체가 교사와 학부모에 이어 마을이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꼰대로 등장하는 것이라면, 평생교육은 마치 프로이트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바탕으로 교육의 균형추가 되어 주어야 한다.


셋째, 선발과 성장의 균형

인류의 영원한 숙제가 자유와 평등의 균형이라면 교육이 당면한 과제는 성장과 선발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완벽한 자유를 위해서는 평등을 포기해야 하고, 완벽한 평등을 위해서는 자유를 억압할 수밖에 없다. 교육 또한, 선발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모든 인간의 내적 성장을 기대할 수는 없다. 반대로 교육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내적 성장을 지원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명제는 늘 다양한 맥락으로 변하는 사회의 요구에 부딪혀 왔다. 선발이 교육의 결과(~zation)라면 성장은 교육의 과정(~ism)이라고 할 수 있다. 입시 경쟁이라는 절박함에서 한발 떨어져 있는 평생교육은 교육의 두 축인 선발과 성장의 균형을 살필 수 있고, 또 그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글을 쓰고 나니 필자의 상상력 또한 빈약하기 이를데 없음을 느낀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은 필자의 비루한 상상에 다른 이들의 무한한 상상을 가두고자 함이 아니다. 상상을 주제로 한 이 조잡한 글이 평생교육 현장에서 불필요한 교육의 경계를 허무는 무한한 상상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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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채희태 

평생학습e음  편집위원

낭만백수를 꿈꾸는 프리랜서, 콘텐츠, 정책 기획자

[백수가 과로에 시달리는 이유] 저자

현재  공주대학교에서 평생교육 박사과정 중에 있다

공동웹진 with 국가평생교육진흥원전국시도평생교육진흥원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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