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전문가를 꿈꾼다. 갈수록 복잡, 다양해지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전문가의 전문성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육이라는 터널을 지나야 한다. 아이들이 초, 중, 고등학교에 다니는 이유도 졸업장이라는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서이다.
대한민국 고등교육법 제33조 1항에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나 법령에 따라 이와 같은 수준 이상의 학력이 있다고 인정된 사람이라고 명시해 놓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졸업장이라는 자격증은 국가가 누구나 딸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기 때문에 갈수록 무용해지고 있다. 1990년 고등학생의 대학 진학률은 고작 27.1%에 불과했지만, 30여 년이 지난 현재는 무려 70%를 훌쩍 넘는다. 그렇다면… 대학생이 3배 가까이 더 많아진 대한민국은 그만큼 더 행복해졌을까?
교육은 우연을 필연으로 둔갑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지녔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는 것은 우연이지만, 교육이라는 과정을 통과하면 그 우연은 노력의 결과라는 필연으로 세탁된다. 미국의 미식축구 선수였던 ‘배리 스위처(Barry Switzer)’는 “어떤 사람들은 3루에서 태어났으면서 자신이 3루타를 친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간다.”며 꼬집기도 했다. 어느 사회나 전문가는 필요하다. 원래 전문가는 사회를 보다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쓸모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노력이라는 필연의 과정을 통해 정치, 행정, 교육 등 이 사회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전문성(專門性)에 입성하고 나면 다양한 전문가들은 자신의 성(城)을 지키기 위해 몰두한다. 20세기 후반 가장 급진적 사상가라고 일컬어지는 일리치(Ivan Illich)는 이미 50여 년 전 『전문가들의 사회』에서 권력화되어 가는 전문성을 비판하기도 했다. 다양한 전문성이 가지고 있는 함정을 폭로하기 위해 시작한 이 글의 목적은 어쩌면 전문화된 교육이 만든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작된 평생교육이 스스로 전문성이라는 함정에 빠져들지 않도록 경계하기 위함이다.
교육에 대한 나름의 견해를 밝히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사실 교육 전문가가 아니다. 가끔 필자를 특정한 영역의 전문가라고 불러주는 사람이 없지는 않다. 그때마다 필자는 에둘러 전문가라는 명칭으로 부르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곤 한다. 수없이 많은 전문성이 난무하고 있는 이 사회에서 그 어떤 전문성도 이 사회의 보편적 성장을 위해 작동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불친절한 전문성에 대한 견해를 보완하기 위해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한번은 학교 밖 청소년을 대상으로 사업을 하고 있는 한 공공기관에 운영위원으로 위촉되어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다. 대부분의 공공기관이 그렇듯 운영위원 앞에서 자신들의 전문성과 그 노력을 한껏 뽐내고 싶었으리라. 그 공공기관은 작년엔 몇 명의 학교 밖 아이들을 만났고, 올해에는 더 많은 학교 밖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발표를 들으며 필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했다.
“이 기관이 점점 더 발전하려면...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은 계속 더 불행해져야 하나요?”
그 기관을 비난하고자 든 비유가 아니다. 그 기관의 대표는 매우 헌신적이며, 서울시에서 이동 쉼터를 위탁받은 그 기관 또한 누구보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인권을 위해 노력해 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저 한껏 복잡해진 사회 속에서 누군가의 전문성이 과연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성실하게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심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은 것이다.
전문성을 비판하기 위한 예로 정치만한 것이 또 있을까?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음모 집단의 내부 고발자, 윤태호 원작의 영화 ‘내부자들’에서는 전문성에 갇힌 정치를 교묘하게 비꼬는 장면이 등장한다. 우장훈 검사(조승우 扮)는 미래자동차 비자금 사건을 조사하던 중 이 사건에 유력한 대선주자인 장필우(이경영 扮)와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사 주간인 이강희(백윤식 扮)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장훈 검사는 이들에게 배신당한 조폭 안상구(이병헌 扮)가 비자금 증거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고, 폴리페서로 국회의원이 된 대학 은사를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우장훈 검사 : 교수님은 요즘 어떠십니까?
폴리페서 : 뭐가?
우장훈 검사 : 걱정이 좀 돼서요. 교수님 같으신 분이 이런 정치판에 계신다는 게 좀...
폴리페서 : 내가 처음 여의도에 들어올 때, 누군가 나한테 그러더라구. 여당, 즉 집권당이 되는 거 외에 국회의원이 정치적으로 지향할 것은 없다. 정치란 큰 의미로 생존! 국가의 생존, 국민의 생존, 그리고 나의 생존이다. 하하…~
영화, “내부자들”의 한 장면. 전문성에 갇힌 정치의 목적은 정치인이 된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소위 정치의 전문성이 지향하는 바가 과연 국가와 국민의 생존일까? 정치인에게 국가와 국민의 생존이 자신의 정치적 생존보다 더 중요할까? 물론 모든 정치인들이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문장 속에 포함된 ‘정치’의 개념과 현재 전문 영역으로 분화되어 존재하는 ‘정치’의 개념이 같지 않다는 것 정도는 막연하게나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정치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비전문적 보편성이라면, 현재 우리가 접하고 있는 정치는 일반인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매우 섬세하고 예민한 전문적인 영역으로서의 정치이다.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사피엔스』에서 “각국 정부가 다음 선거보다 더 먼 미래를 내다보는 일이 드문 상황”이라는 표현으로 인류의 미래와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전문화된 정치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했다. 정치의 전문성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현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 외에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인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있기는 할까?
오해를 덜기 위해 부연하자면, 필자는 정치적 동물로 태어난 인간으로서 정치를 인간으로부터 분리하고, 혐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보편적 정치의 개념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대중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치를 하나의 예로 들었을 뿐, 전문성의 함정은 비단 정치 영역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선발을 중심으로 한 근대적 학령기 교육을 보완하기 위해 시작된 평생교육 또한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자격증을 중심으로 전문가의 성(城)을 쌓는다면, 언제든 전문성의 함정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평생교육도 결국 교육이기 때문이다. 다음 칼럼에서는 전문성의 시작과 그 역설에 대해 다뤄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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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채희태
- 낭만백수를 꿈꾸는 프리랜서, 콘텐츠, 정책 기획자
- [백수가 과로에 시달리는 이유] 저자
- 현재 공주대학교에서 평생교육 박사과정 중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전문가를 꿈꾼다. 갈수록 복잡, 다양해지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전문가의 전문성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육이라는 터널을 지나야 한다. 아이들이 초, 중, 고등학교에 다니는 이유도 졸업장이라는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서이다.
대한민국 고등교육법 제33조 1항에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나 법령에 따라 이와 같은 수준 이상의 학력이 있다고 인정된 사람이라고 명시해 놓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졸업장이라는 자격증은 국가가 누구나 딸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기 때문에 갈수록 무용해지고 있다. 1990년 고등학생의 대학 진학률은 고작 27.1%에 불과했지만, 30여 년이 지난 현재는 무려 70%를 훌쩍 넘는다. 그렇다면… 대학생이 3배 가까이 더 많아진 대한민국은 그만큼 더 행복해졌을까?
교육은 우연을 필연으로 둔갑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지녔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는 것은 우연이지만, 교육이라는 과정을 통과하면 그 우연은 노력의 결과라는 필연으로 세탁된다. 미국의 미식축구 선수였던 ‘배리 스위처(Barry Switzer)’는 “어떤 사람들은 3루에서 태어났으면서 자신이 3루타를 친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간다.”며 꼬집기도 했다. 어느 사회나 전문가는 필요하다. 원래 전문가는 사회를 보다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쓸모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노력이라는 필연의 과정을 통해 정치, 행정, 교육 등 이 사회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전문성(專門性)에 입성하고 나면 다양한 전문가들은 자신의 성(城)을 지키기 위해 몰두한다. 20세기 후반 가장 급진적 사상가라고 일컬어지는 일리치(Ivan Illich)는 이미 50여 년 전 『전문가들의 사회』에서 권력화되어 가는 전문성을 비판하기도 했다. 다양한 전문성이 가지고 있는 함정을 폭로하기 위해 시작한 이 글의 목적은 어쩌면 전문화된 교육이 만든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작된 평생교육이 스스로 전문성이라는 함정에 빠져들지 않도록 경계하기 위함이다.
교육에 대한 나름의 견해를 밝히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사실 교육 전문가가 아니다. 가끔 필자를 특정한 영역의 전문가라고 불러주는 사람이 없지는 않다. 그때마다 필자는 에둘러 전문가라는 명칭으로 부르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곤 한다. 수없이 많은 전문성이 난무하고 있는 이 사회에서 그 어떤 전문성도 이 사회의 보편적 성장을 위해 작동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불친절한 전문성에 대한 견해를 보완하기 위해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한번은 학교 밖 청소년을 대상으로 사업을 하고 있는 한 공공기관에 운영위원으로 위촉되어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다. 대부분의 공공기관이 그렇듯 운영위원 앞에서 자신들의 전문성과 그 노력을 한껏 뽐내고 싶었으리라. 그 공공기관은 작년엔 몇 명의 학교 밖 아이들을 만났고, 올해에는 더 많은 학교 밖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발표를 들으며 필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했다.
“이 기관이 점점 더 발전하려면...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은 계속 더 불행해져야 하나요?”
그 기관을 비난하고자 든 비유가 아니다. 그 기관의 대표는 매우 헌신적이며, 서울시에서 이동 쉼터를 위탁받은 그 기관 또한 누구보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인권을 위해 노력해 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저 한껏 복잡해진 사회 속에서 누군가의 전문성이 과연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성실하게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심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은 것이다.
전문성을 비판하기 위한 예로 정치만한 것이 또 있을까?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음모 집단의 내부 고발자, 윤태호 원작의 영화 ‘내부자들’에서는 전문성에 갇힌 정치를 교묘하게 비꼬는 장면이 등장한다. 우장훈 검사(조승우 扮)는 미래자동차 비자금 사건을 조사하던 중 이 사건에 유력한 대선주자인 장필우(이경영 扮)와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사 주간인 이강희(백윤식 扮)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장훈 검사는 이들에게 배신당한 조폭 안상구(이병헌 扮)가 비자금 증거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고, 폴리페서로 국회의원이 된 대학 은사를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우장훈 검사 : 교수님은 요즘 어떠십니까?
폴리페서 : 뭐가?
우장훈 검사 : 걱정이 좀 돼서요. 교수님 같으신 분이 이런 정치판에 계신다는 게 좀...
폴리페서 : 내가 처음 여의도에 들어올 때, 누군가 나한테 그러더라구. 여당, 즉 집권당이 되는 거 외에 국회의원이 정치적으로 지향할 것은 없다. 정치란 큰 의미로 생존! 국가의 생존, 국민의 생존, 그리고 나의 생존이다. 하하…~
영화, “내부자들”의 한 장면. 전문성에 갇힌 정치의 목적은 정치인이 된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소위 정치의 전문성이 지향하는 바가 과연 국가와 국민의 생존일까? 정치인에게 국가와 국민의 생존이 자신의 정치적 생존보다 더 중요할까? 물론 모든 정치인들이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문장 속에 포함된 ‘정치’의 개념과 현재 전문 영역으로 분화되어 존재하는 ‘정치’의 개념이 같지 않다는 것 정도는 막연하게나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정치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비전문적 보편성이라면, 현재 우리가 접하고 있는 정치는 일반인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매우 섬세하고 예민한 전문적인 영역으로서의 정치이다.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사피엔스』에서 “각국 정부가 다음 선거보다 더 먼 미래를 내다보는 일이 드문 상황”이라는 표현으로 인류의 미래와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전문화된 정치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했다. 정치의 전문성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현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 외에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인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있기는 할까?
오해를 덜기 위해 부연하자면, 필자는 정치적 동물로 태어난 인간으로서 정치를 인간으로부터 분리하고, 혐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보편적 정치의 개념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대중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치를 하나의 예로 들었을 뿐, 전문성의 함정은 비단 정치 영역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선발을 중심으로 한 근대적 학령기 교육을 보완하기 위해 시작된 평생교육 또한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자격증을 중심으로 전문가의 성(城)을 쌓는다면, 언제든 전문성의 함정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평생교육도 결국 교육이기 때문이다. 다음 칼럼에서는 전문성의 시작과 그 역설에 대해 다뤄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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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채희태
- 낭만백수를 꿈꾸는 프리랜서, 콘텐츠, 정책 기획자
- [백수가 과로에 시달리는 이유] 저자
- 현재 공주대학교에서 평생교육 박사과정 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