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교육과 전문성의 역설 | 편집위원 채희태

2023-11-07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전문성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문성을 직업으로 치환해 보면 이해가 쉽다. 별의별 고급스러운 직업부터 하찮아 보이는 직업까지 지구상에 존재하는 직업의 수가 그나마 인류의 숫자만큼 분화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정도다. 


만약 전문성이 수평적 역할 관계로 분화해 왔다면 좋았겠지만, 전문성은 주로 수직적 권력 관계로 분화되어왔다. 앞의 글, “전문성의 시작”에서도 언급했듯 애초에 전문성이 지배와 피지배, 즉 계급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수직적 권력 관계로의 분화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이 단지 선언적 명제가 아니라면, 모든 전문성은 수평적 역할 관계로 존재하는 것이 맞다. 


손과 발의 역할이 다른데 손이 발보다 위에 있다고 해서, 손이 발보다 냄새가 덜 나는 환경에 있다고 해서 우월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의도와 무관하게 전문성이 수평적 역할 관계가 아닌 수직적 권력 관계로 분화하고 있는 것은 전문성이 가지고 있는 첫 번째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전문성의 두 번째 역설은 무엇일까? 사회가 복잡해지며 우리는 한 사람이 어설프게 감당해 왔던 모든 일을 잘게 쪼갠 후 각각 다양한 전문가에게 위임한다. 정치는 정치인에게, 법은 판‧검사와 변호사에게, 행정은 관료에게, 그리고 교육은 교사에게…. 단순히 역할과 권한만 위임하는 것이 아니다. 전문가의 역할과 권한 뒤에는 책임이 따른다. 


우리는 전문가가 져야 하는 책임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설픔을 용납하지 않고, 마치 신에 준하는 완벽을 요구한다. 근대 이후 인간은 자신의 희로애락을 ‘모두’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인간인 동시에 신의 역할을 하고 있는 전문가에게 그 역할을, 권한을, 그리고 책임을 전가해 왔다. 


한낱 인간인 전문가가 신에 준하는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자신에게 주어진 전문성 안에 숨는 것이다. 그래서 숙련된 전문가는 절대 자신이 책임질 수 없는 일은 하지 않는다. 눈앞에서 배가 침몰하고, 그 안에서 꽃다운 아이들이 죽어가도, 배를 띄워 그 아이들을 구조해야 할 역할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아무리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려도 소용이 없다. 


이 시대를 사는 전문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문성의 책임을 넘어서는 오지랖을 발휘해 보려고 시도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자신의 전문가 선배로부터 이런 충고를 듣지 않았을까?


“그 사람을 구해주고 나면 보따리도 달라고 할 텐데, 책임질 수 있겠어?”


우리가 전문성에 과도하게 몰입한 결과 전문성과 전문성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공백이 생겼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 거대한 공백을 메울 전문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문성의 두 번째 역설은 이 시대 모든 책임은 신이 아닌 인간 전문가에게 전가되지만, 그 어떤 전문가도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는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순을 자양분 삼아 더욱 공고한 전문가의 성을 구축한다. 정치 전문가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열심히 혐오의 사회를 건설하고 있으며, 교육 전문가는 과도한 입시 경쟁이 교육의 가장 큰 문제라는 걸 모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게임의 규칙을 대놓고 부정하지 못한다. 영화 <빅 쇼트>1) 와 <국가 부도의 날>2) 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나라가 망한다”에 배팅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 금융 전문가들이 등장한다.


 

국가 부도의 날 포스터



“아니, 이걸로 돈을 버시려면 아, 이건 뭐 나라가 망해야지 되는 건데, 이건…“

<국가 부도의 날> 중에서 



전문성의 첫 번째, 두 번째 역설은 전문성의 세 번째 역설로 이어진다. 특정 분야에 대해 역할과 권한, 그리고 부담스러운 책임까지 위임받은 ‘인간’ 전문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문성이 곧 자신의 밥그릇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전문가들의 밥그릇 지키기에 비전문가인 시민들은 대체로 무지하거나 무관심하다. 만약 시민이 상식에 기초해 전문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 대부분의 전문가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라며 선을 긋는다. 그 전문성의 분야가 정치든, 경제든, 그리고 교육이든….


전문성에 위임된 ‘역할’과 그 권한에 따라 전가된 ‘책임’, 그리고 역할과 책임에 따른 ‘밥그릇’의 크기는 전문성을 구성하는 3요소이다. 전문성은 생산성 확대를 위한 노동 분화의 결과이고, 그 분화된 최초의 전문성이 계급이다 보니 그런 요소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전문성의 분화, 그리고 분화된 전문성 안에서 수없이 많은 전문성들이 각개약진을 한 결과 마침내 인류는 생존을 위한 충분한 크기의 파이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이를 계속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들의 ‘선해 보이는 의도’는 역설적으로 자신에게 전문성을 부여하고 인정해 준 시민과 시대의 상식에 반하는 ‘악한 결과’로 이어진다. 


전문성의 세 번째 역설은 전문가가 전문성의 시대 안에서 그저 전문성의 밥그릇을 지키는 이해당사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마치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듯, 우리 사회의 주요한 정책 결정 권한을 이해당사자인 전문가에게 쥐여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전문성의 3요소



필자는 전문성이 인류의 모든 역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농경사회 이후 분화된 전문성은 경제적으로 생산력의 확대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관료제는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을 분리해 복잡한 인간사회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또한 이전 칼럼에서도 밝혔듯 인류가 계급의 전문성으로 분화되지 않았다면 우리가 누리고 있는 빛나는 문명의 성취는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컵에 반쯤 차 있는 물을 보고도 ‘반이나’ 또는 ‘반밖에’라는 관점이 있을 수 있듯, 긍정성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 측면, 또는 부정성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 측면을 살피는 것은 사물이나 현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된다. 긍정성이 과하면 부정적 결과로 이어지고, 과잉된 부정성은 역설적으로 좋은 결과를 낳기도 한다. 그래서 일찍이 동양에선 공자가 “과유불급”을, 서양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메소테스(mesotes, 중용)’를 강조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평생교육과 관련한 전문성을 논의하기 위해 쓰기 시작한 세 편의 칼럼을 마무리할 시간이다. 학령기 아이들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평생교육은 전문적인 지식을 중심으로 누군가를 줄 세우기 위해 노력하기보단,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상식의 영역을 끊임없이 확장해야 한다. 모든 전문가들이 각자의 성(城) 안에서 열심히 찻잔 속 회오리를 만들어 내고 있을 때 평생교육은 전문성과 전문성이 수평적으로 교류할 수 있도록 물꼬를 터 주어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역할을 담당할 사회체계는 평생교육밖에 없다. 사회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필자가 평생교육 박사학위에 도전한 이유는 사회 구성원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평생교육이라면 사회학과 교육학 사이에 있는 단단한 성을 허물 수 있다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수없이 많은 전문성이 난무하는 사회 속에서 평생교육 하나쯤은 전문성 안에 갇히기보단 전문성과 전문성을 나누고 있는 단단한 경계 위에 존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1)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

2) 1997년 한국의 IMF 사태를 소재로 만든 영화.



글 채희태

- 낭만백수를 꿈꾸는 프리랜서, 콘텐츠, 정책 기획자

- [백수가 과로에 시달리는 이유] 저자

- 현재 공주대학교에서 평생교육 박사과정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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