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오래된 역설, 페미니즘 | 편집위원 채희태

2024-03-05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세계 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세대 문제와 더불어 첨예한 갈등의 소재로 부상하고 있는 페미니즘에 대해 한번 짚어보려 한다.

여성도 아닌 남성이 페미니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평생교육이 품어야 하는 건 평생(lifelong)이라는 시간뿐만 아니라, 그 시간 속에서 만나는 모든 것이라 생각하기에 감히 펜을 들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페미니즘의 시작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는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바댕테르(lisabeth Badinter)’는 보부아르의 장례식에서 “세상의 모든 여성들이여! 그대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전부 보부아르 덕택이다.”라는 조사(弔詞)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페미니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혹시 내가 알고 있는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의 실체가 아닌 모종의 편견 덩어리는 아닐까? 몇 년 전 타계한 페미니스트 ‘훅스(bell hooks)'는 대중들은 일반적으로 페미니즘을 남성과 동등해지려는 여성들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페미니즘을 반(反) 남성주의로 오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인간은 문명을 통해 환경을 지배해 온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철저하게 문명이 개척한 환경의 지배를 받아왔다. 페미니즘 또한 가부장제라고 하는 지극히 인위적인 환경 속에서 배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유발 하라리(Yoval Noah Harari)’는 가부장제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인위성을 생물학적 사실과는 무관한 근거 없는 신화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가부장 사회는 농업이 시작되면서 등장했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곽노필, 2020). 그리고 먼저 농경을 제안한 것은 남성이 아닌 여성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농경은 남성이 담당했던 사냥보다는 여성이 담당했던 채집의 정보가 축적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약 19만 년 동안 모계사회를 이끌어 왔던 여성은 어느 날 사냥을 떠나는 남성에게 사냥이 아닌 농경을 ‘명(命)’했을 수도 있다. 


아마 인류가 맞이한 최초의 역설은 농경일지 모른다. 농경이 시작되자 인류의 종족 생존에 필요한 여성과 남성의 기여도가 역전되었다. 다산은 여전히 중요했지만, 농사를 지을 노동력과 애써 수확한 농작물을 지킬 수 있는 전투력을 가진 남성을 낳는 것이 더욱 필요해졌다. 이른바 가부장제가 시작된 것이다. 


가부장이라는 권력을 손에 쥔 남성들은 이제 그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모든 지배계급이 그래왔듯, 생물학적 사실과 무관한 가부장제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가장 간편한 방법은 신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구약 창세기의 맨 처음에 등장하는 에덴동산 이야기는 농경의 시작이 선악과를 들이민 여성이었다는 ‘증거’와 애초에 여성은 남성의 갈비뼈에서 비롯되었다는 ‘차별’의 의미를 버무린 비겁한 신화라고 할 수 있다.


여성들은 지난 1만여 년 동안 농경에서 비롯한 생산력 확대라는 인류의 새로운 목표를 위해 가부장제의 억압을 견뎌왔다. 11세기에 등장해 중세의 계급 질서 밖에서 후천적 노력으로 부를 축적했던 부르주아지들은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고, 과소비와 중복 소비는 과잉생산이라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할 솔루션이 되었다. 



나아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이르러 농경으로부터 이어졌던 인간의 고단한 노동을 기계가 대신할 수 있게 되었지만, 가부장제의 달콤한 권력에 취해 있던 남성들은 인류가 새로운 목표 앞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거나 또는 부정했고, 여성들은 “미투”를 외치며 마침내 페미니즘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포했다.


역사는 미시적으로는 변증법이 작용하는 듯 보이나, 거시적으로는 역설이 적용된다. 그리스와 로마의 신을 허무하게 무너뜨렸던 기독교의 역설은 암흑의 터널 중세로 이어졌고,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일으켰던 십자군의 역설은 7세기를 돌고 돌아 신이 지배해 왔던 중세를 무너뜨렸다. 그리고, 가부장제의 역설인 페미니즘이 등장하기까지는 무려 1만 년이 걸렸다. 역설의 속도는 정보의 양과 속도에 비례한다. 지금 우리는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역설의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순은 반복되거나 교체된다. 그리고 해결이 불가능한 이러한 모순들은 점점 더 복잡성을 띤다. 혹자는 몇 년 전부터 떠오르고 있는 젠더 갈등이 더 심각한 모순이었던 민주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기 때문에 등장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한때 故 노무현 대통령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심정으로 두드렸던 대한민국의 가장 큰 모순은 정치를 둘러싼 지역 갈등이었다. 지역 갈등이 수면 아래로 잦아들자, 수면 위로 떠 오른 새로운 모순은 세대 갈등이었다. 사회학자 전상진은 세대 갈등 논리는 누군가에 의해 기획된 게임일 뿐이며, 그 배후에는 계급 모순을 은폐하기 위한 음모가 숨겨져 있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청춘을 민주화의 재단에 던졌던 586세대는 민주화와 더불어 경제적 풍요가 만든 새로운 모순을 인지하려 들지도, 인정하려 하지도 않았다. 전쟁 세대가 계층 상승을 위해 학벌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무지한 꼰대였다면, 민주화 세대인 586은 우골탑 위에 세워진 자신들의 지위를 자녀들에게 대물림하기 위해 학벌을 이용하는 유식한 꼰대가 되었다. 악마와 싸우다 악마가 되듯, 586의 자녀 세대는 신념의 계몽주의로 무장한 부모 세대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각과 다른 모든 것을 부정하는, 이른바 어린 꼰대로 거듭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젠더 문제에 전상진의 세대 게임 논리를 대입해 보면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이대남과 이대녀는 그저 젠더 전쟁의 총알받이라고 할 수 있다. 이대녀뿐만 아니라 학창 시절 가부장제의 수혜를 제대로 누려보지도 못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이 되자마자 자동으로 가부장제의 가해자가 되어버리는 이대남 또한 가부장제의 또 다른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작 가부장제의 추억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는 기성세대는 세대 갈등과 버무려진 젠더 갈등 뒤에 숨어 당사자가 아닌 제삼자의 위치에서 그저 젠더 전쟁을 관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보고 성찰해 보아야 한다.


필자는 한때 의도뿐만 아니라 노력과 무관하게 가부장제의 수혜를 누려온 죄책감으로 인해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엔 남성들이 여성들의 지배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던 적도 있었다(2020년 8월 3일, 오마이뉴스에 기고했던 “남성들이여, 이제 코르셋을 입고 화장을 하자” 참조). 


하지만 국가정책의 실패로 인해 등장한 거버넌스가 부도덕한 시장에게 다시 정책의 칼자루를 넘겨주는 것이 아니듯, 만약 페미니즘이 벨 훅스의 말처럼 착취와 억압의 반복이 아니라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는 것”으로 작동할 수 있다면 인류의 유전자에서조차 지워진 모계사회와 여전히 권력으로 작동하고 있는 가부장제의 현명한 대안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혁명적 페미니즘 운동에서 남성의 페미니즘 의식화는 여성의 의식화만큼 중요하며, 남성과 연대해 투쟁하지 않고서 페미니즘 운동은 전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참고한 글들

• 곽노필(2020). “가부장 사회로 미래를 맞아도 될까?”. 『한겨레신문』, (10/11).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965277.html>

• 전상진(2018). 『세대 게임』. 문학과지성사.

• 채희태(2020). “남성들이여, 이제 코르셋을 입고 화장을 하자”. 『오마이뉴스』, (8/3).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2663678>

• 벨 훅스(2017).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이경아 역. 문학동네.

• 유발 하라리(2015). 『사피엔스』. 조현욱 역. 김영사.



글 채희태

- 낭만백수를 꿈꾸는 프리랜서, 콘텐츠, 정책 기획자

- [백수가 과로에 시달리는 이유] 저자

- 공주대학교에서 평생교육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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