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법과 복수 사이에 숨겨진 평생교육적 함의 | 편집위원 채희태

2023-07-04

법과 복수, 그리고 평생교육은 서로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인간의 뇌는 사물을 인지하고 분류(categorize)하는 과정에서 정교하게 진화해 왔다. 무작위로 나열된 100개의 사물을 기억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먼저 사물의 특징을 파악해 분류하는 것이다.

음식, 탈 것, 동물 등등…. 반면, 서로 다른 범주의 개념을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매우 고단한 지적 노동이 요구된다. 아마 법과 복수, 그리고 평생교육의 연관성을 파악하는 일도 그럴 것이다. 왜 뜬금없이 법과 복수, 그리고 평생교육을 연관 지어 생각해야 하는 것이 중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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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 제도의 범주에 있는 개념이라면, 복수는 제도와는 무관한 심리 범주의 개념이다. 또한 법이 주로 공적인 영역을 담당한다면, 복수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적 영역에 속해 있다. 그리고 평생교육을 포함한 교육은 제도인 동시에 인간 개개인의 심리와도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공과 사를 넓게 아우르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서로 무관해 보이는 이 세 개의 단어 사이의 연관성을 밝히는 것이 이번 칼럼의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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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법부터 이야기해 보자. 7월 17일은 대한민국 제헌 헌법이 제정, 공포된 것을 기념하는 제헌절이다. 모두 알고 있듯이 법을 상징하는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Justitia)는 한 손에는 저울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있다. 저울이 공정함을 상징한다면, 칼은 법의 지엄함을 드러낸다. 그리고 정의의 여신이 눈을 가리고 있는 이유는 법 앞에 선 모두를 평등하게 대하기 위해서라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정말 법은 모든 사람한테 공정하고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제도의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법은 공정, 그리고 평등과는 다소 무관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법은 자체적으로 공정과 평등에 대해 직접적인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법은 그 사회가 공정하든 공정하지 않든, 또는 평등하든 평등하지 않든 그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작동하기 때문이다. 과거 군부독재 시절, 법이 누구의 편이었는가를 떠올려보면 이 주장이 전혀 허황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독재와 민주주의가 대결했던 과거 30여 년 전 법은 일반적으로 민주주의보다는 독재의 손을 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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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억압과 피억압이 존재했던 계급 사회에서는 현재 법이 하고 있는 역할을 신화나 우화가 담당해 왔다. 신화, 그리고 우화의 목표 또한 공정과 평등이 아니라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사회의 질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겉으로는 공정과 평등을 표방하지만, 결과적으로 불공정과 불평등한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법으로 인해 사적이면서 심리적 범주에 있는 복수가 스멀스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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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복수가 새로운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는 증거는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는 법과는 다르게 이 시대를 종횡무진 흐르고 있는 문화콘텐츠를 통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학폭에 대한 복수를 다룬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와 아예 복수 대행 서비스를 내건 <모범 택시>가 대표적이다. 과거엔 사회를 보다 공정하고 평등하게 만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혁명을 꿈꾸었을지 모르지만, 혁명도, 혁명을 수행할 집단도 힘을 잃은 지금, 사회가 불공정하고 불평등하다고 느끼는 개인들은 대부분 은밀하고 위대하게 복수를 꿈꾼다. 그리고 문화콘텐츠는 그러한 대중의 심리를 부추겨 돈을 챙긴다.


그것이 물리적 폭력이든, 아니면 심리적 세뇌든 대부분의 개인이 집단이 추구하는 목표에 동의하는 사회에서는 신화나 우화, 그리고 법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빅뱅처럼 팽창하고 있는 정보와 그 정보로 인해 한껏 복잡해진 사회에서 살게 된 지금, 불확실성과 복잡성 속에서 그 어떤 집단보다 우월해진 개인은 신화로도, 우화로도, 그리고 법으로도 통제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나의 불행을 남 탓으로 돌리고, 그 억울함을 해소하기 위해 복수를 꿈꾸거나 실행에 옮기고, 그도 아니면 소심하게 복수를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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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부터 이러한 시대의 경향성을 읽어낸 사람은 <복수는 나의 것>, <올드 보이>, <친절한 금자씨>를 통해 복수 3부작을 완성한 박찬욱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박찬욱 감독은 복수 3부작을 마무리하며 <친절한 금자씨>를 통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너나 잘하세요.”


매우 시니컬해 보이는 이 대사 안에는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평생교육의 중요한 함의가 들어 있다. 법과 복수는 현재 우리 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려 있는 개념들이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 법은 복잡한 현실의 문제를 공정하면서 평등하게 다룰 의지가 없으며, 그렇다고 개인적으로 복수를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주어진 지식과 정보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기존의 교육과는 다르게 평생교육은 불확실성 속에서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는 지식과 정보의 수평적 공유를 지향한다. 평생교육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전가의 보도”는 아니지만, 법과 복수 사이에서 이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담당한다. 법은 공정과 평등을 실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것을 유지하고 보호하는 도구이다. 지식과 정보를 수평적으로 공유하는 평생교육은 공정과 평등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법이 공정과 평등을 지켜주는 사회에서 복수의 필요성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법에 모든 것을 의존하고, 법이 아니면 복수를 꿈꾸는 대신 평생교육을 통해 지식과 정보를 이 사회의 모든 이들과 수평적으로 공유하며 자신을 성찰해 보면 어떨까?


글 채희태

- 낭만백수를 꿈꾸는 프리랜서, 콘텐츠, 정책 기획자

- [백수가 과로에 시달리는 이유] 저자

- 현재 공주대학교에서 평생교육 박사과정 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