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스포츠와 평생교육 | 편집위원 채희태

2023-08-01

이번 달 <이음의 탐구생활>에서 농구인 “박찬숙 감독”을 만난다고 전해 들었다. 박찬숙 감독은 1984년 LA 올림픽에서 여자 농구팀의 은메달을 견인했던 국민 영웅이었으며, 농구 ‘덕분’에 재수를 했던 필자의 고교 시절 우상이었다.

당시 박찬숙 선수의 영향력을 현재와 비교하면 배구선수 “김연경”이나, 축구선수 “손흥민”, “이강인”쯤 되지 않을까? 같은 농구 선수로 비교하자면, 올림픽에서 전무후무한 “트리플 더블(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두 자리)”을 기록했던 하나은행 “전주원” 코치 정도가 있겠지만, 박찬숙 선수 이후 대한민국이 올림픽에서 메달권에 진입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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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 필자의 기억 속에서도 가물가물해져 가고 있던 박찬숙 감독이 과거에서 소환되어 서대문구청 여자 농구팀 감독으로 깜짝 등장해 <이음의 탐구생활>과 만난다니 어찌 감회가 새롭지 않겠는가! 지금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가고 있지만, 개발도상국이었던 7~80년대 대한민국에는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를 외쳤던 4전 5기의 권투선수 “홍수환”이 있었고, 독일 국민의 기억 속에 더 또렷이 남아있는 축구선수 “차범근”이 있었다. 1997년 초유의 국가 부도 사태 때도 대한민국 국민들은 “박찬호” 선수와 “박세리” 선수의 경기를 보며 견뎌냈으니, 스포츠가 가지고 있는 힘이 결코 교육에 비해 작다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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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지난 추억에 빠져 칼럼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잃을 뻔했다. 이번 칼럼에서는 농구 선수 박찬숙 감독을 모티브로 교육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스포츠 속에 꼭꼭 숨겨져 있는 평생교육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농구선수 박찬숙은 몰라도 2018년 평창에서 열렸던 동계 올림픽에서 “영미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컬링 국가대표팀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동계올림픽에는 하계올림픽만큼 인기 종목이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국민은 지난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컬링이라고 하는 아이들 장난 같은 스포츠의 매력에 푸욱 빠졌었다. 안경 언니, “김은정”을 주축으로 이루어진 “팀킴”이 결승까지 오르며 화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 또한 경기의 규칙을 하나씩 배워가며 컬링의 매력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던 중 필자는 우리나라 대표팀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선수들의 컬링 경기를 보며 낯선 점을 하나 발견했다. 컬링 경기를 중계하는 해설 위원이 다른 나라 컬링 선수들을 소개하며 선수의 직업을 언급하는 것이었다. 아니, 국가를 대표하는 컬링 선수면 직업이 컬링 선수 아닌가? 그런데 다른 나라 컬링 선수들은 대한민국 국가대표팀과는 다르게 대부분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4강전에서 만났던 숙적, 일본의 컬링팀을 이끌었던 “후지사와 사츠키” 선수의 직업도 보험 설계사라고 소개가 되었다. 이 낯섦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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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을 잔인하다고 이야기했던 영국의 시인 T. S. 엘리엇은 시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낯선 것을 익숙하게 보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적응의 동물 인간은 종종 익숙한 것을 옳은 것, 그리고 낯선 것을 옳지 않은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낯선 것이 나에게 이익을 가져다줄지, 아니면 해를 입힐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 경향은 선과 악의 어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선과 악의 그리스어인 ‘agathon’과 ‘kakon’은 원래 “이익이 되는 것”과 “손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이익과 손해가 익숙함과 낯섦을 거쳐 선과 악으로 치환되어 가치론(axiology)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물론 개인보다 집단이 우선시 되었던 시대, 이익과 손해의 기준은 개인이 아닌 집단이었을 것이다. 즉, 집단으로 존재하는 인간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선으로, 손해를 입히는 것은 악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현재 개인의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지켜내야 하는 집단의 이익이라는 것이 여전히 남아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최근 극장판을 개봉하며 30여 년 만에 다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만화, <슬램덩크>에도 대한민국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낯선 장면이 등장한다. 주인공 강백호가 소속된 북산고가 지역 예선을 통과했는데, 본선 경기에 출전하려면 4과목 이상 낙제가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농구선수가 농구만 잘하면 되는 것 아닌가? 지금은 올림픽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어 프로선수들의 각축장이 되었지만, 애초에 올림픽에는 아마추어 선수들에게만 출전이 허용되었다. 아마추어는 직업이 아닌 취미로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이다. 일본 야구의 경우 올림픽에는 프로선수들이 출전을 하지만, 아시안 게임에는 여전히 직장인 야구팀이 출전한다. 그리고 일본의 아마추어 야구팀은 아시안 게임에서 늘 메달을 획득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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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엘리트의 나라다. 경제도 엘리트 자본인 대기업에 몰빵해 성장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전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엘리트 교육이 있었다.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헝그리 정신이 있어야 체육 엘리트가 되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다. 대중음악 분야에서는 기획사가 작정하고 달려들어 아이돌 엘리트를 프로그래밍한다. 


저변이라고 하는 토대가 부실한 엘리트 시스템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사상누각이다. 피겨 스케이팅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김연아는 대한민국 피겨 제국의 나 홀로 여왕이며, 2018년 평창 올림픽에서 ‘영미 신드롬’을 일으키며 컬링 은메달을 딴 대한민국의 컬링 선수는 곧 대한민국 컬링의 부실한 저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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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50년 전 경제 성장의 과정에서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필요했던 학벌에 대한 욕망이 어느 정도 경제 성장을 이룬 대한민국의 현재를 헬조선으로 만들고 있다. 우리가 추앙하고 있는 ‘경쟁(competition)’이라는 단어는 ‘함께 분투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라틴어, ‘competrere’가 그 어원이다. 경쟁은 각자의 최선을 끌어내기 위해 인간이 고안한 최고의 구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쟁이 이상하게 대한민국과 만나기만 하면 목적을 잃은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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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수에게만 이익을 가져다주는 경쟁은 아이러니하게도 다수의 선으로 자리를 잡으며 이내 모두에게 익숙해진다. 경쟁이 스포츠와 만나면 스포츠가 직업인 프로선수와 그 선수들의 경기를 보며 박수갈채를 보내는 대중만 남게 된다. 이는 마치 낯선 정보가 범람하는 시대에 배움의 책임을 오롯이 학령기 아이들에게만 전가하고 배움에 전혀 관심이 없는 대중들은 1등만 바라보는 대한민국의 교육 현장과도 유사하다.


하지만 만약 대한민국의 교육이 아이들에게만 배움을 요구하는 학령기 교육에서 벗어나 우리가 부러워하는 북유럽의 교육처럼 평생교육의 의미로 받아들여진다면, 그리고 이러한 평생교육의 원리를 스포츠에도 적용해 단지 돈을 많이 버는 직업 선수가 아니더라도 모든 국민이 평생 다양한 스포츠를 직접 즐길 수 있게 된다면 미래엔 헬조선에서 벗어나 더 똑똑하고 건강한 대한민국이 되지 않을까?


글 채희태

- 낭만백수를 꿈꾸는 프리랜서, 콘텐츠, 정책 기획자

- [백수가 과로에 시달리는 이유] 저자

- 현재 공주대학교에서 평생교육 박사과정 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