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교육으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읽기

2022-08-27


[칼럼] 채희태 편집위원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를 색다른 감동으로 물들이고 있다. 드라마, <스카이 캐슬>이 불륜이 아닌 교육을 주제로도 얼마든지 막장 전개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면,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굳이 자극적인 주제와 소재가 아니더라도 대중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듯 보인다. 아마도 문화콘텐츠 제작자들이 그걸 몰랐다기보다는 대중들의 말초신경을 직접 자극하는 것이 에둘러 감동을 끌어내는 것보다 훨씬 더 가성비가 높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개가 사람을 물어 화제가 되려면 별도의 스토리텔링이 필요하지만, 사람이 개를 물면 이유 불문하고 대중들의 이목을 끌 수 있다. 그래서 이 시대의 문화콘텐츠는 사람이 개를 무는 이야기들로 넘쳐난다.



▲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공식포스터, 우영우 역 (출처 : ENA공식홈페이지)



문화콘텐츠의 성공 문법과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일반적으로 SF가 아닌 리얼리티에 기반한 문화콘텐츠의 성공 문법은 촌철살인과도 같은 현실의 반영이거나, 또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대리 만족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징어 게임>이 전자에 속했다면,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이례적으로 후자를 선택해 뭇 대중들의 시간을 비집고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그렇다면 대중들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통해 어떤 대리 만족을 느끼고 있을까? 

인간은 누구나 구조화된 편견 속에서 살아간다. 편견은 주로 경험과 결합하여 막강한 힘을 갖는다. 로빈 M. 호가스(Robin M. Hogarth)와 엠레 소이야르(Emre Soyer)는 『경험의 함정(The myth of experience)』에서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경험은 오히려 약점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경험의 사회적 쓸모는 교육과도 매우 유사해 보인다. 오롯이 경험에만 기대는 것도 문제지만, 인간이 세상을 이해할 방법으로 경험만 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경험이 어떻게 편견의 자양분이 되고 있는지는 전쟁을 경험한 은퇴 세대와 민주화를 경험한 586세대, 그리고 공정하지 않은 방식으로라도 불공정이 판치는 헬조선을 탈출하고 싶어 하는 청년세대를 통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편견의 기저에는 이렇게 파편일 수밖에 없는 경험들이 강력한 똬리를 틀고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빅뱅 수준으로 팽창하고 있는 정보의 양으로 인해 경험이 가지는 상대적 영향력이 갈수록 작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차라리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생각이 편견일지 모른다고 의심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그럴수록 더더욱 자신의 경험 속으로 깊숙이 숨어 버린다. 


당연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당연하게 군림해 온 다양한 편견들을 소환하고 있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우화, “벌거벗은 임금님”과 매우 유사한 스토리텔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익의 추구를 생존행위로 착각하며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임금님이 벌거벗고 행진을 하든, 춤을 추든 그 당연하지 않은 행위를 그저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당연하지 않게 유지되고 있는 다양한 편견들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인 이해당사자가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우리 모두가 암묵적으로 수면 아래에 고이 안치해 두었던 당연하지 않은 편견들을 아무렇지 않은 듯 끄집어냈다.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의 정체를 눈치 없이 까발린 어린아이처럼...



우영우의 직장 상사인 정명석 변호사는 우영우 변호사의 특별한 능력을 확인한 후 자신이 가졌던 편견에 대해 사과한다. 우리는 알고 있다. 직장에서 상사가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절대 쉽지 않다는 것을… 하지만 우영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답한다. “이제라도 아셨으니 다행”이라고... 잘못한 사람은 사과를 했고, 사과를 받은 사람은 잘못을 인지한 것에 대해 다행이라고 답했다. 상사와 부하 직원이라는 위계를 걷어내고 보면 이보다 더 당연한 대화는 없다. 하지만 그 당연한 대화를 현실에서 할 수 없으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통해 대리 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소환하는 편견이 단지 장애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동성애에 대한 편견(2화, 흘러내린 웨딩드레스), 탈북자에 대한 편견(6화, 내가 고래였다면), 교육에 대한 편견(9화, 피리 부는 사나이), 그리고 법에 대한 편견(10화, 손잡기는 다음에) 등, 그 경계를 가리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어린이는 지금 당장 놀아야 한다”는 어린이 해방군 선언을 제창하는 방구뽕(구교환 扮)과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난 복받쳐 오르는 울음을 애써 억눌러야 했고, 지적 장애인을 사랑하는 비장애인의 감정을 전지전능한 법이 단지 장애인 부모가 가진 편견의 평균에 기초해 판단하는 걸 보며 찜찜함을 지울 수 없었다. 일찍이 니클라스 루만(Niclas Luhmann)은 인간의 의식 세계는 꿰뚫어 볼 수 없는 암흑 상자들(black boxes)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과거에는 사회가 추구하는 공공의 가치를 위해 개인이 가진 암흑 상자를 법이 함부로(?) 심판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개인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지켜야 할 공공의 가치라는 것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책을 읽지 않아도 되는 이유와 드라마를 반드시 보아야 하는 이유

나는 만화를 꽤 좋아한다. 문과인 내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대부분의 과학 지식은 어렸을 적 만화를 통해 섭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만화를 보자 부모님은 나이가 몇인데 만화를 보냐고 핀잔을 주셨다. 프랑스가 만화를 건축, 조각, 회화, 음악, 문학, 공연, 영화, 사진에 이어 제9의 예술 매체로 인정하고 있는 것과, 대중들에게 사랑받은 적지 않은 드라마의 원작이 웹툰인 것을 감안하면 이는 매우 강력한 편견이었던 것 같다. 더불어 난 드라마를 소재로 이야기 나누는 것을 즐긴다. 그러다 가끔 자랑스럽게 자신은 드라마(따위)는 보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지인을 만나기도 한다. 한때 만화가 불량하다는 굴레를 쓰고 있었던 것처럼, TV라는 바보상자를 통해 전달되는 드라마 또한 바보들의 이야기라는 오명을 안고 있는 것 같다.  


가끔 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처럼 엉뚱한 생각을 한다. 만약 100명 중 5명이 책을 읽고, 50명이 드라마를 본다면 나는 꼴랑 5명이 읽는 책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50명이나 보는 드라마를 선택할 것인가? 만약 100명 중 6번째로 책을 읽는다면 난 목에 힘을 주며 나머지 94명에게 거드름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책도 안 읽냐며, 아도르노가 경계한 변증법이 불가능한 계몽을 시전할지도 모른다. 책을 읽는 행위가 나 하나의 만능감을 높이는 데는 기여하겠지만, 이 사회 구성원들의 작은 합의를 이끌어내는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공론장이 사라지고 있는 이 시대엔 5명밖에 읽지 않는 책을 보느니, 차라리 50명이 보는 드라마를 보며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소크라테스처럼 책을 읽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유튜브를 통해 다양한 인문학 지식을 전달해 인기를 얻고 있는 유튜버 “조승연”은 <오징어 게임>이 넷플릭스를 통해 방영된 후 프랑스 지인들로부터 부쩍 전화가 걸려 온다며 그 내용을 소개한 적이 있다. 프랑스의 학자들은 열심히 연구한 결과를 책이나 논문을 통해 소수에게만 전달하는데 대한민국의 위대한 감독들은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전 세계가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를 생산해 내고 있다는 것이다. 


뒤늦게 사회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내가 평생교육에 투신(?)한 이유 중 하나는 대한민국이 이룩한 빛나는 경제 성장을 지속 가능하게 하려면 그에 부합하는 시민의 성장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시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나와 함께 성장할 동반자로 여긴다면 잠시 읽던 책과 논문을 덮어두고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보며 여전히 이 사회의 수면 아래에서 잠자고 있는 다양한 편견들을 끄집어내 보면 어떨까? 개인적으로 갈수록 복잡하게 분화하고 있는 이 시대에 드라마만 한 질적 연구 결과물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새로운 경험을 통해 과거의 편견을 깨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경험을 통해 일신우일신 새로운 편견을 생산해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인류가 평생교육에게 부여한 어떤 사명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교육이 또 다른 편견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태곳적부터 이어져 내려왔으나, 이 시대에 이르러 더없이 하찮아지고 있는 다양한 편견들과 맞서는 것은 아닐까? 이상하디, 이상하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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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채희태 

평생학습e음  편집위원

낭만백수를 꿈꾸는 프리랜서, 콘텐츠, 정책 기획자

[백수가 과로에 시달리는 이유] 저자

현재  공주대학교에서 평생교육 박사과정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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