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음의 탐구생활] 서대문구 여자실업농구단 박찬숙 감독

[이음의 탐구생활]
각자의 분야에서 학습과 교육, 놀이, 예술 및 사회이슈 등을 통해 스스로 탐구하고 즐거움을 찾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만의 인사이트를 얻어가는 인터뷰 기획코너

‘최연소 국가대표’, ‘최초 주부 선수’, ‘한국 구기 종목 사상 첫 올림픽 메달 획득’ 등등 수많은 수식어를 보유한 농구선수 박찬숙에게 또 다른 수식어가 붙었다. ‘최연장 농구감독’이다. 지난 3월 29일 창단한 서대문구 여자실업농구팀의 감독으로서 박찬숙 감독이 은퇴 18년 만에 화려하게 코트로 복귀했다.
농구 여제로 불리던 박 감독은 선수시절 190cm의 큰 키와 남다른 기량으로 센터는 물론 포워드로서의 능력까지 갖춘 올 어라운드 플레이어로서 코트 위에서 활약했다. 하루에 수십 통의 팬레터를 받을 정도로 인기를 끌며 1970년대와 80년대를 대한민국 여자 농구 전성기로 수놓기도 했다. 스타 선수로 활약한 데는 실력도 있지만 미모도 한몫했다. 감독으로 화려하게 복귀한 박 감독을 훈련이 한창인 북아현문화체육센터에서 만났다.
“안녕하세요? 영원한 농구인 박찬숙입니다.”
12살에 농구를 시작한 후 50년 넘게 농구인으로서 살아온 그녀에게 딱 맞는 소개였다. 1985년 은퇴 후 결혼을 하고 3년간의 공백이 있었지만, 박 감독은 결국 다시 코트로 돌아와 농구인의 길을 걸었다. 최초 주부 선수로 태평양화학에서 다시 활약을 하다가 태평양화학과 염광여자중학교에서 코치로 지내고 대한농구협회 이사, 한국여자농구연맹 여자농구 혁신위원회 위원장 등 꾸준히 농구와 함께 했다. 그리고 드디어 염원하던 여자농구단의 감독이 됐다. 그녀가 감독을 맡은 서대문구 여자실업농구단은 올해 3월 29일 창단했는데 서울시 자치구 직장운동경기부 중 유일한 단체 구기 종목팀이다.

“코치나 국가대표 감독을 잠깐 한 적은 있지만, 정식으로 농구단 감독을 맡은 것은 처음입니다. 언젠가는 감독이 되고 싶다는 염원이 마침내 이루어져서 정말 행복한 요즘입니다. 서대문 구민의 기대에 어긋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어깨가 무겁기도 하고요. 그래도 여자 농구 활성화에 일조하고 싶다는 마음에 그 무게감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앞으로 보는 재미가 있는 공격 농구를 펼쳐나갈 계획입니다. 공격 농구를 해야 발전할 수 있거든요. 처음부터 우승은 못 하겠지만 보는 재미가 있는 농구를 하면서 여자 농구의 영광을 재현하는 팀으로 만들어가겠습니다.”
감독으로서 제2의 농구 인생을 시작한 박 감독은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던 이유로 꿈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자세를 꼽았다. 어릴 때 꽤 공부를 잘했던 학생에서 농구로 전향하고 마침내 농구 선수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해온 결과다. 지금은 감독을 맡아 힘들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영어공부도 꾸준히 해왔다는 박 감독. 예전부터 외국 사람과 영어로 대화하고 싶다는 꿈을 꾸었던 박 감독은 꿈을 이루기 위해 배움에 도전한 것이다. 결과보다 배움의 과정이 더 중요하고 배우는 데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는 경험을 통해 계속 성장하고 있는 박감독과 농구를 시작한 계기부터 앞으로의 계획까지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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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보기 드문 장신의 선수, 유망주에서 농구 여제로

Q. 농구를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초등학교 5학년 때 키가 크다는 이유로 감독님이 농구를 권하셨어요. 그때 키가 170㎝가 넘었어요. 솔직히 입학하기 전까지 제가 키가 크다는 것을 몰랐어요. 그런데 입학 후 아이들이랑 있으면 아이들 머리밖에 안 보이더라고요. 머리 하나는 더 컸으니까요. 그때는 키 큰 것을 놀리는 아이들도 많아서 항상 위축된 편이었어요.
그래도 공부는 곧잘 해서 반장도 맡고 선생님을 대신해서 아이들 지도도 했어요. 운동이랑은 완전 거리가 먼 생활이었죠. 감독님이 갑자기 농구를 해보라고 하는데 전 운동을 해본 적도 없고 할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안 한다고 했었죠. 그런데 감독님이 부모님께 다시 부탁을 했고 부모님께서 저에게 농구를 해보라고 권하셨어요. 두 분 다 학창시절에 달리기 선수였기 때문에 운동에 호의적이셨던 것도 있었어요. 그렇게 농구를 시작한 거죠.
Q. 농구선수에 입문하자마자 유망주로 불리셨는데요, 원래 운동신경이 뛰어난 편이셨나요?
전혀 아니었어요. 일단 시작한 후로는 감독님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했을 뿐이에요. 그 당시 감독님이 굉장히 칭찬을 많이 해주셨어요. 감독님이 저보고 힘껏 점프해보라고 하시면 제가 그 말씀대로 행동을 하는 거예요. 저도 신기하다고 느낄 정도였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잠재적인 능력이 있었던 건데 농구를 하면서 그 능력이 드러난 거예요. 그렇게 훈련을 하면서 조금씩 좋아지는 것이 느껴져서 더 열심히 했어요.
그리고 6학년 때 그 당시 <소년 동아일보>라는 어린이 신문에 제가 나가게 된 것도 열심히 한 이유 중 하나였어요. 그때도 키가 큰 것 때문에 나간 셈이에요. 키 큰 유망주라고요. 그렇게 전국 신문에 실리고 나니까 책임감이 정말 커지더라고요. 키만 크고 실력이 없다고 할까 봐 악착같이 훈련을 했어요. 그리고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179㎝까지 컸어요.

Q. 1975년 고등학교 1학년 때 최연소 국가 대표 선수가 됐습니다. 그때부터 농구 여제라는 호칭도 붙기 시작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키가 188㎝였는데 그 정도 키를 가진 사람이 없어서 제가 뽑힌 것 같아요. 70년대만 해도 장신의 선수를 거의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실력이 좋았다기보다 나이는 어려도 장신의 선수니까 미래를 위해서 뽑자고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아직 어린 나이다 보니 국가대표가 굉장히 영광스러운 자리이지만 저는 겁부터 나더라고요. 바로 위 선배님이 저보다 10살 이상 많았으니까 어울릴 사람도 없었고요. 선생님들 빨래해야지 선배님들 뒷바라지도 해야지, 정말 힘들었어요. 그때 유일한 낙이 일기 쓰기였습니다. 매일 울면서 일기에 별별 말을 다 쓰다 보면 눈물 때문에 종이가 찢어질 정도였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사춘기를 겪을 나이였는데 정신없이 훈련하면서 지나간 것 같아요. 눈물 바람으로 보냈지만, 그 시기를 겪으며 제가 농구선수로서 단단한 뿌리를 내릴 수 있었고 영원한 농구인이 될 힘을 기를 수 있었어요. 그 후 남들은 한 번 출전도 어렵다는 세계선수권대회를 3번이나 출전했고 LA올림픽에서 은메달도 목에 걸 수 있었어요. 국제적인 경기를 치르면서 많이 성장했지요.
Q. 구기 종목 최초로 올림픽 메달을 따셨는데 감독님은 원래 LA올림픽을 참가하지 않으려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올림픽에 나가기 전 무릎이 아파서 수술을 했는데 복귀가 제대로 안 되니까 자신감이 확 떨어졌어요. 이런 상태에서 올림픽에 나가봤자 실력 발휘도 안 되고 성적도 안 좋을 테니까 그냥 은퇴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그때 감독님께서 ‘네가 여기서 그냥 은퇴를 하면 그간 쌓아온 공든 탑이 무너지는 거다. 박찬숙이란 이름이 그냥 사라진다’고 말씀하시면서 저에게 잘 선택하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박찬숙이란 이름이 사라진다’는 그 말에 번쩍 정신이 나더라고요. 마무리를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싶어서 당장 짐을 싸서 태릉선수촌으로 들어갔어요. 국가 대표 선수로 10년간 훈련을 했는데 그때 한 달 동안 했던 것만큼 운동을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주장으로서 정말 열심히 다른 선수들을 격려해가면서 파이팅 넘치게 경기를 끌어서 은메달까지 딸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선수들을 지도할 때 항상 하는 말이 ‘네가 기둥이잖아, 기둥이 흔들리면 어떡해’라고 말합니다. 기둥 역할을 하는 선수가 다른 선수들을 끌어가는 것이 감독의 열 마디보다 힘이 있다는 것을 그 당시 배웠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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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으로서 제2의 농구 인생 시작, 그동안 해온 대로 열심히 해야죠

Q. 이번에 서대문구 여성실업농구단 감독이 되셨습니다. 화려했던 선수 시절을 보내셨는데 의외로 감독으로는 이번이 첫 팀입니다.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가는 것처럼 어렵습니다. 그 많은 농구선수들이 은퇴 후 농구 쪽 일을 하려면 코치나 감독을 해야 하는데 자리가 별로 없거든요. 저도 은퇴 후 감독이 되고 싶어서 많은 곳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하지만 대스타였던 선수를 감독으로 채용하기에는 부담스럽다거나 여자가 무슨 감독을 하느냐는 말로 거부당했지요. 제가 왜 여자라서 안 되냐고 따지니까 스포츠는 위기가 많을 텐데 여자가 그걸 잘 헤쳐나갈 수 있겠냐고 하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는 제가 국가인권위원회에 고발을 했어요.
제가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에 분노하기도 했지만 내가 여기서 이 말을 받아들이면 후배들에게도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를 좀 무서워하는 분들도 있었어요. 항상 지도자가 되겠다는 꿈을 접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감독이 될 수 있었던 거죠. 그래서 요즘 몸은 힘들어도 하루하루가 정말 행복합니다.

Q. 서대문구 여자실업농구단의 선발 과정과 어떤 팀으로 만들고 싶으신지 궁금합니다
여자 농구에는 프로팀이 있고 프로팀은 최고의 선수들을 뽑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로로 가기 위해서 선수들이 드래프트를 신청합니다. 그런데 프로는 여섯 팀밖에 안 되는 반면 드래프트를 신청하는 선수는 2~30명이나 돼요. 그러면 절반 이상이 떨어지게 되고 이들은 갈 곳이 없어집니다. 평생을 프로만 바라보고 농구를 한 선수들이 갈 곳이 없어지는 거죠.
그래서 이번에 선수들을 뽑을 때 실력은 있는데 프로팀이나 대학팀에 가지 못한 친구들을 뽑았어요. 기본기가 탄탄한 선수들은 잘 지도하면 모든 걸 해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선수들이 여기서 마음껏 농구를 하다가 다시 프로팀에 재도전할 수 있도록 저의 연륜과 지도력을 발휘해 훈련을 시키고 있습니다. ‘너희들 여기서 열심히 해서 프로에 도전해. 얼마든지 선생님이 밀어줄 테니 열심히 해.’ 그렇게 말해주니까 선수들이 모두 정말 열심히 해요. 월급 받으면서 실컷 농구를 할 수 있고 심지어 다시 프로를 갈 수 있다는 꿈을 꾸니까 모두 신나게 운동을 하고 있어요.
서대문구청장인 이성헌 청장님께 오갈 데 없는 선수들이 많은데 그 선수들이 운동을 할 수 있게 팀을 창단해달라고 부탁을 드렸는데 팀을 창단한 데다 저를 초대감독으로 불러주셨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농구단 창단은 쉬운 일이 아닌데도 큰 결심을 해주신 청장님께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Q. 젊은 선수들을 지도하는 데 어려움은 없으신가요?
팀을 창단하고 났는데 제가 선수들을 파악하지 못한 탓에 아무리 얘기해도 선수들이 잘 따라오지 않는 거예요.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초기에는 제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우왕좌왕했어요. 그리고 선수들이 저를 무서워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어린 선수들과 잘 지내기 위해서 함께 숙소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선수들이 저랑 생활하는 걸 어려워하기도 하지만 제가 선수들을 빨리 알아야 해서 같이 지내고 있어요. 선수들의 호흡도 중요하고 저와 선수들의 호흡을 맞추는 것도 정말 중요합니다. 원팀이 되어야 하는데 그건 감독의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다행히 지금은 선수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능력도 커졌고 저도 선수들이 모두 제 품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희 팀이 3월 29일 창단식을 해서 이제 5개월 정도밖에 안 됐지만 5월에 전국실업농구연맹전을 치렀고 7월 30일 두 번째 대회를 치르게 됩니다. 서로 손발이 잘 맞아야 하는데 짧은 시간에 비해 호흡이 잘 맞아서 이번에는 더 나은 결과를 얻게 될 것 같습니다.

Q. 앞으로 감독으로서, 농구인으로서의 미래를 어떻게 그리고 계시는지요?
일단 감독으로서 반드시 우리 팀이 우승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겁니다. 감독으로서 은퇴하기 전에 우승을 해야죠. 그리고 감독을 그만두더라도 농구인으로서의 삶은 계속해나갈 겁니다. 대한민국 농구협회 회장을 한다든가 프로농구 연맹의 총재를 할 수도 있겠죠. 아니면 요즘 젊은 스포츠인 중에 문체부 차관도 나오고 있는데 저도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기회가 오면 무조건 할 겁니다. 나이가 들어도 전 늦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감독을 할 기회를 잡을 수 있었잖아요? 지금까지 그냥 열심히 살았던 것 같아요. 좌고우면하지 않고 현재의 자리에서 열심히, 착하게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겁니다. 그리고 영원한 농구인 박찬숙으로서 팬들한테 영원히 잊히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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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선민
사진 강민구
[이음의 탐구생활] 서대문구 여자실업농구단 박찬숙 감독
[이음의 탐구생활]
각자의 분야에서 학습과 교육, 놀이, 예술 및 사회이슈 등을 통해 스스로 탐구하고 즐거움을 찾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만의 인사이트를 얻어가는 인터뷰 기획코너
‘최연소 국가대표’, ‘최초 주부 선수’, ‘한국 구기 종목 사상 첫 올림픽 메달 획득’ 등등 수많은 수식어를 보유한 농구선수 박찬숙에게 또 다른 수식어가 붙었다. ‘최연장 농구감독’이다. 지난 3월 29일 창단한 서대문구 여자실업농구팀의 감독으로서 박찬숙 감독이 은퇴 18년 만에 화려하게 코트로 복귀했다.
농구 여제로 불리던 박 감독은 선수시절 190cm의 큰 키와 남다른 기량으로 센터는 물론 포워드로서의 능력까지 갖춘 올 어라운드 플레이어로서 코트 위에서 활약했다. 하루에 수십 통의 팬레터를 받을 정도로 인기를 끌며 1970년대와 80년대를 대한민국 여자 농구 전성기로 수놓기도 했다. 스타 선수로 활약한 데는 실력도 있지만 미모도 한몫했다. 감독으로 화려하게 복귀한 박 감독을 훈련이 한창인 북아현문화체육센터에서 만났다.
“안녕하세요? 영원한 농구인 박찬숙입니다.”
12살에 농구를 시작한 후 50년 넘게 농구인으로서 살아온 그녀에게 딱 맞는 소개였다. 1985년 은퇴 후 결혼을 하고 3년간의 공백이 있었지만, 박 감독은 결국 다시 코트로 돌아와 농구인의 길을 걸었다. 최초 주부 선수로 태평양화학에서 다시 활약을 하다가 태평양화학과 염광여자중학교에서 코치로 지내고 대한농구협회 이사, 한국여자농구연맹 여자농구 혁신위원회 위원장 등 꾸준히 농구와 함께 했다. 그리고 드디어 염원하던 여자농구단의 감독이 됐다. 그녀가 감독을 맡은 서대문구 여자실업농구단은 올해 3월 29일 창단했는데 서울시 자치구 직장운동경기부 중 유일한 단체 구기 종목팀이다.
“코치나 국가대표 감독을 잠깐 한 적은 있지만, 정식으로 농구단 감독을 맡은 것은 처음입니다. 언젠가는 감독이 되고 싶다는 염원이 마침내 이루어져서 정말 행복한 요즘입니다. 서대문 구민의 기대에 어긋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어깨가 무겁기도 하고요. 그래도 여자 농구 활성화에 일조하고 싶다는 마음에 그 무게감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앞으로 보는 재미가 있는 공격 농구를 펼쳐나갈 계획입니다. 공격 농구를 해야 발전할 수 있거든요. 처음부터 우승은 못 하겠지만 보는 재미가 있는 농구를 하면서 여자 농구의 영광을 재현하는 팀으로 만들어가겠습니다.”
감독으로서 제2의 농구 인생을 시작한 박 감독은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던 이유로 꿈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자세를 꼽았다. 어릴 때 꽤 공부를 잘했던 학생에서 농구로 전향하고 마침내 농구 선수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해온 결과다. 지금은 감독을 맡아 힘들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영어공부도 꾸준히 해왔다는 박 감독. 예전부터 외국 사람과 영어로 대화하고 싶다는 꿈을 꾸었던 박 감독은 꿈을 이루기 위해 배움에 도전한 것이다. 결과보다 배움의 과정이 더 중요하고 배우는 데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는 경험을 통해 계속 성장하고 있는 박감독과 농구를 시작한 계기부터 앞으로의 계획까지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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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보기 드문 장신의 선수, 유망주에서 농구 여제로
Q. 농구를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초등학교 5학년 때 키가 크다는 이유로 감독님이 농구를 권하셨어요. 그때 키가 170㎝가 넘었어요. 솔직히 입학하기 전까지 제가 키가 크다는 것을 몰랐어요. 그런데 입학 후 아이들이랑 있으면 아이들 머리밖에 안 보이더라고요. 머리 하나는 더 컸으니까요. 그때는 키 큰 것을 놀리는 아이들도 많아서 항상 위축된 편이었어요.
그래도 공부는 곧잘 해서 반장도 맡고 선생님을 대신해서 아이들 지도도 했어요. 운동이랑은 완전 거리가 먼 생활이었죠. 감독님이 갑자기 농구를 해보라고 하는데 전 운동을 해본 적도 없고 할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안 한다고 했었죠. 그런데 감독님이 부모님께 다시 부탁을 했고 부모님께서 저에게 농구를 해보라고 권하셨어요. 두 분 다 학창시절에 달리기 선수였기 때문에 운동에 호의적이셨던 것도 있었어요. 그렇게 농구를 시작한 거죠.
Q. 농구선수에 입문하자마자 유망주로 불리셨는데요, 원래 운동신경이 뛰어난 편이셨나요?
전혀 아니었어요. 일단 시작한 후로는 감독님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했을 뿐이에요. 그 당시 감독님이 굉장히 칭찬을 많이 해주셨어요. 감독님이 저보고 힘껏 점프해보라고 하시면 제가 그 말씀대로 행동을 하는 거예요. 저도 신기하다고 느낄 정도였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잠재적인 능력이 있었던 건데 농구를 하면서 그 능력이 드러난 거예요. 그렇게 훈련을 하면서 조금씩 좋아지는 것이 느껴져서 더 열심히 했어요.
그리고 6학년 때 그 당시 <소년 동아일보>라는 어린이 신문에 제가 나가게 된 것도 열심히 한 이유 중 하나였어요. 그때도 키가 큰 것 때문에 나간 셈이에요. 키 큰 유망주라고요. 그렇게 전국 신문에 실리고 나니까 책임감이 정말 커지더라고요. 키만 크고 실력이 없다고 할까 봐 악착같이 훈련을 했어요. 그리고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179㎝까지 컸어요.
Q. 1975년 고등학교 1학년 때 최연소 국가 대표 선수가 됐습니다. 그때부터 농구 여제라는 호칭도 붙기 시작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키가 188㎝였는데 그 정도 키를 가진 사람이 없어서 제가 뽑힌 것 같아요. 70년대만 해도 장신의 선수를 거의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실력이 좋았다기보다 나이는 어려도 장신의 선수니까 미래를 위해서 뽑자고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아직 어린 나이다 보니 국가대표가 굉장히 영광스러운 자리이지만 저는 겁부터 나더라고요. 바로 위 선배님이 저보다 10살 이상 많았으니까 어울릴 사람도 없었고요. 선생님들 빨래해야지 선배님들 뒷바라지도 해야지, 정말 힘들었어요. 그때 유일한 낙이 일기 쓰기였습니다. 매일 울면서 일기에 별별 말을 다 쓰다 보면 눈물 때문에 종이가 찢어질 정도였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사춘기를 겪을 나이였는데 정신없이 훈련하면서 지나간 것 같아요. 눈물 바람으로 보냈지만, 그 시기를 겪으며 제가 농구선수로서 단단한 뿌리를 내릴 수 있었고 영원한 농구인이 될 힘을 기를 수 있었어요. 그 후 남들은 한 번 출전도 어렵다는 세계선수권대회를 3번이나 출전했고 LA올림픽에서 은메달도 목에 걸 수 있었어요. 국제적인 경기를 치르면서 많이 성장했지요.
Q. 구기 종목 최초로 올림픽 메달을 따셨는데 감독님은 원래 LA올림픽을 참가하지 않으려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올림픽에 나가기 전 무릎이 아파서 수술을 했는데 복귀가 제대로 안 되니까 자신감이 확 떨어졌어요. 이런 상태에서 올림픽에 나가봤자 실력 발휘도 안 되고 성적도 안 좋을 테니까 그냥 은퇴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그때 감독님께서 ‘네가 여기서 그냥 은퇴를 하면 그간 쌓아온 공든 탑이 무너지는 거다. 박찬숙이란 이름이 그냥 사라진다’고 말씀하시면서 저에게 잘 선택하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박찬숙이란 이름이 사라진다’는 그 말에 번쩍 정신이 나더라고요. 마무리를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싶어서 당장 짐을 싸서 태릉선수촌으로 들어갔어요. 국가 대표 선수로 10년간 훈련을 했는데 그때 한 달 동안 했던 것만큼 운동을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주장으로서 정말 열심히 다른 선수들을 격려해가면서 파이팅 넘치게 경기를 끌어서 은메달까지 딸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선수들을 지도할 때 항상 하는 말이 ‘네가 기둥이잖아, 기둥이 흔들리면 어떡해’라고 말합니다. 기둥 역할을 하는 선수가 다른 선수들을 끌어가는 것이 감독의 열 마디보다 힘이 있다는 것을 그 당시 배웠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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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으로서 제2의 농구 인생 시작, 그동안 해온 대로 열심히 해야죠
Q. 이번에 서대문구 여성실업농구단 감독이 되셨습니다. 화려했던 선수 시절을 보내셨는데 의외로 감독으로는 이번이 첫 팀입니다.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가는 것처럼 어렵습니다. 그 많은 농구선수들이 은퇴 후 농구 쪽 일을 하려면 코치나 감독을 해야 하는데 자리가 별로 없거든요. 저도 은퇴 후 감독이 되고 싶어서 많은 곳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하지만 대스타였던 선수를 감독으로 채용하기에는 부담스럽다거나 여자가 무슨 감독을 하느냐는 말로 거부당했지요. 제가 왜 여자라서 안 되냐고 따지니까 스포츠는 위기가 많을 텐데 여자가 그걸 잘 헤쳐나갈 수 있겠냐고 하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는 제가 국가인권위원회에 고발을 했어요.
제가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에 분노하기도 했지만 내가 여기서 이 말을 받아들이면 후배들에게도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를 좀 무서워하는 분들도 있었어요. 항상 지도자가 되겠다는 꿈을 접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감독이 될 수 있었던 거죠. 그래서 요즘 몸은 힘들어도 하루하루가 정말 행복합니다.
Q. 서대문구 여자실업농구단의 선발 과정과 어떤 팀으로 만들고 싶으신지 궁금합니다
여자 농구에는 프로팀이 있고 프로팀은 최고의 선수들을 뽑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로로 가기 위해서 선수들이 드래프트를 신청합니다. 그런데 프로는 여섯 팀밖에 안 되는 반면 드래프트를 신청하는 선수는 2~30명이나 돼요. 그러면 절반 이상이 떨어지게 되고 이들은 갈 곳이 없어집니다. 평생을 프로만 바라보고 농구를 한 선수들이 갈 곳이 없어지는 거죠.
그래서 이번에 선수들을 뽑을 때 실력은 있는데 프로팀이나 대학팀에 가지 못한 친구들을 뽑았어요. 기본기가 탄탄한 선수들은 잘 지도하면 모든 걸 해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선수들이 여기서 마음껏 농구를 하다가 다시 프로팀에 재도전할 수 있도록 저의 연륜과 지도력을 발휘해 훈련을 시키고 있습니다. ‘너희들 여기서 열심히 해서 프로에 도전해. 얼마든지 선생님이 밀어줄 테니 열심히 해.’ 그렇게 말해주니까 선수들이 모두 정말 열심히 해요. 월급 받으면서 실컷 농구를 할 수 있고 심지어 다시 프로를 갈 수 있다는 꿈을 꾸니까 모두 신나게 운동을 하고 있어요.
서대문구청장인 이성헌 청장님께 오갈 데 없는 선수들이 많은데 그 선수들이 운동을 할 수 있게 팀을 창단해달라고 부탁을 드렸는데 팀을 창단한 데다 저를 초대감독으로 불러주셨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농구단 창단은 쉬운 일이 아닌데도 큰 결심을 해주신 청장님께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Q. 젊은 선수들을 지도하는 데 어려움은 없으신가요?
팀을 창단하고 났는데 제가 선수들을 파악하지 못한 탓에 아무리 얘기해도 선수들이 잘 따라오지 않는 거예요.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초기에는 제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우왕좌왕했어요. 그리고 선수들이 저를 무서워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어린 선수들과 잘 지내기 위해서 함께 숙소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선수들이 저랑 생활하는 걸 어려워하기도 하지만 제가 선수들을 빨리 알아야 해서 같이 지내고 있어요. 선수들의 호흡도 중요하고 저와 선수들의 호흡을 맞추는 것도 정말 중요합니다. 원팀이 되어야 하는데 그건 감독의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다행히 지금은 선수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능력도 커졌고 저도 선수들이 모두 제 품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희 팀이 3월 29일 창단식을 해서 이제 5개월 정도밖에 안 됐지만 5월에 전국실업농구연맹전을 치렀고 7월 30일 두 번째 대회를 치르게 됩니다. 서로 손발이 잘 맞아야 하는데 짧은 시간에 비해 호흡이 잘 맞아서 이번에는 더 나은 결과를 얻게 될 것 같습니다.
Q. 앞으로 감독으로서, 농구인으로서의 미래를 어떻게 그리고 계시는지요?
일단 감독으로서 반드시 우리 팀이 우승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겁니다. 감독으로서 은퇴하기 전에 우승을 해야죠. 그리고 감독을 그만두더라도 농구인으로서의 삶은 계속해나갈 겁니다. 대한민국 농구협회 회장을 한다든가 프로농구 연맹의 총재를 할 수도 있겠죠. 아니면 요즘 젊은 스포츠인 중에 문체부 차관도 나오고 있는데 저도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기회가 오면 무조건 할 겁니다. 나이가 들어도 전 늦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감독을 할 기회를 잡을 수 있었잖아요? 지금까지 그냥 열심히 살았던 것 같아요. 좌고우면하지 않고 현재의 자리에서 열심히, 착하게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겁니다. 그리고 영원한 농구인 박찬숙으로서 팬들한테 영원히 잊히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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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선민
사진 강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