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음의 탐구생활] 이경란 소설가
[이음의 탐구생활]
각자의 분야에서 학습과 교육, 놀이, 예술 및 사회이슈 등을 통해 스스로 탐구하고 즐거움을 찾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만의 인사이트를 얻어가는 인터뷰 기획코너
소설가 이경란 작가의 작품을 관통하는 것은 소통과 이해를 통한 성장이다. 소설집 <빨간 치마를 입은 아이>나 장편소설 <오로라 상회의 집사들>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모두 소외된 사람들, 상처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이경란 작가는 함께 걸어가자고 손을 내민다. 사회적 소수에 대한 깊은 이해는 그녀의 삶의 여정에서 비롯됐을지도 모른다. 그녀 역시 잘 나가는 잡지사 기자로 지내다가 아이를 위해 직장을 그만두었던 경력단절여성이었다. 철야와 야근이 다반사여도 일은 재미있었는데 딸아이가 점점 학교에서 천덕꾸러기가 돼가는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직장생활을 10년 만에 접고, 그 아이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뒷바라지에 매진했다. 아이가 대학에 진학했을 때 자신의 인생을 살고자 소설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아이도 대학은 갔지만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고 어떤 꿈을 이루며 살아갈지 모르는 나이잖아요? 내가 무력하게, 우울하게 있으면서 아이한테는 ‘너는 꿈을 찾아서 살아라.’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고 포기하고 싶을 때 아이한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자는 마음으로 버텼어요. 나는 포기하면서 아이한테 포기하지 말고 뭐든지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게 7년 가까운 시간 동안 습작을 거듭하다 201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오늘의 루프탑>으로 등단했다. 등단 후 꾸준히 작품활동을 해 소설집 <빨간 치마를 입은 아이> <다섯 개의 예각>, 장편소설 <오로라 상회의 집사들> <마이 디어 송골매>를 펴냈다. 그중 <오로라 상회의 집사들>은 대만판, 태국판으로도 출간될 예정으로 작가로서의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나이 50이 넘어 작가에 도전하고 늦깎이 작가이지만 소설을 쓰며 더 깊고 넓은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다는 이경란 작가를 만나 소설가로서의 삶에 대해 들어보았다.
글을 쓰는 게 정말 행복합니다
Q. 나이 들어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성공하는 경우가 많지 않잖아요?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해서 진짜 소설가가 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어떻게 해내셨어요?
해냈다기보다 그냥 열심히 썼어요. 처음 내가 나이 들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고민하다 글을 쓰는 것이 가장 경제적 부담이 없더라고요.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나만 열심히 하면 되는 게 바로 소설을 쓰는 일이더라고요. 소설가로 인정받기까지는 진입장벽이 굉장히 높지만, 습작을 하는 데는 진입장벽이 없다는 것도 있고요. 그래서 시작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막상 쓰기 시작했더니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제가 좋아서 하다 보니 7년 가까운 시간 동안 습작만 하면서 지냈어도 정말 행복했어요.
Q. 원래 글 쓰는 것을 좋아하셨나요?
아니에요. 습작하면서 제가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한 작품 한 작품 완성될 때마다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다음 작품을 또 쓰게 되고, 또 잘 쓰고 싶으니까 좋은 작품을 찾아서 읽게 되더라고요. 독서의 재미도 있어서 좋아하는 작품도 찾아 읽다 보면 자극을 받아서 더 열심히 쓰게 되는 것 같아요. 기자로 일할 때도 글을 썼지만, 그때는 마감 일정을 맞추느라 바빴고 돈 버는 데 도움이 되니까 한 거예요. 그때는 정말 항상 글을 쓰면서도 재미있다는 생각은 못 했어요. 그런데 제가 습작을 하던 내내 누구도, 어떤 것도 보상이 보장되지 않았는데도 글을 쓰는 자체를 즐기게 되더라고요. 마감도 없고 제 페이스대로 찬찬히 쓰고 싶은 이야기를 만들어 갈 수 있어서 그랬나 싶어요.
세상의 작은 존재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따뜻한 작품들
Q. 습작도 많이 하셨고 등단하신 후 벌써 4권의 책을 내셨는데요, 매번 다른 줄거리를 만드는 특별한 방법이 있나요?
저는 딱히 다음에 무엇을 쓸까 고민하지 않아요. 그냥 어느 날 이것이 소설이 될까? 한번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어요. 그런 순간이 있으면 그게 보통 소설까지 되는 편이에요. 처음 습작할 때 빼고는 쓸 게 없어서 막막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항상 쓰고 싶은 게 생겨서 지금 빨리 이걸 마무리하고 다음 이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오히려 계획을 세우면 오래 걸리는 것 같아요. 제가 고민해서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제 역량을 생각하지 않고 욕심을 부리게 돼서 그런 것 아닌가 싶더라고요. 제가 소설을 쓰겠다고 결심했을 때 계획한 소설은 아직도 완성을 못하고 쓰고 있어요. 제가 역량이 안 되는 것이었죠. 그래서 역량이 갖춰지면 다시 써야겠다 생각했다가 지금은 역량이 갖춰지기를 기다리지 말고 쓰자는 생각으로 바뀌었어요. 쓰다 보면 역량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다시 붙잡고 있는데 여전히 어려워요.
Q. <디어 마이 송골매>는 쓰는 데 12년이 걸렸다고 말씀하셨어요. 이렇게 오래 걸린 이유가 있으셨나요?
초고를 쓴 건 2011년이었어요. 우연히 보게 된 토크쇼에서 들은 한마디가 꽂혔죠. “저는 53년생입니다. 전쟁통에도 사랑이 있었습니다. 젊은이 여러분, 사랑하세요.” 그 말을 들은 순간 이걸 쓰자 싶더라고요. 좋아하고 잘 알고 재미있는 이야기. 송골매 재결합 콘서트를요. 제가 송골매 팬이었거든요. 처음에 단편으로 썼던 걸 몇 년 후에 매만지면서 중편이 됐다가 다시 단편이 됐다가 마침내 장편으로 탄생한 거예요. 이야기도 송골매 재결합 콘서트가 성사됐다가 되지 못했다가 다시 개최하기로 했다가 취소되고 버전이 계속 바뀌었어요. 그러다 2022년 진짜 송골매 재결합 콘서트가 열린 거예요. 수없이 고쳐 쓰고 던져두었다가 다시 꺼내 매만지는 과정이 지긋지긋하면서도 황홀했어요.
Q. 소설의 묘사가 굉장히 생생해서 묘사하신 공간이 머릿속에 그려질 정도입니다. 그런 섬세한 묘사를 할 수 있는 특별한 재주가 있으신 건가요?
한 주제가 떠오르면 그걸 쓰기 위해서 취재를 먼저 해요. 독자들이 소설을 읽을 때 디테일이 느껴져야 공감대가 넓어지거든요. 상상만으로 쓰면 현실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취재하다 보면 계속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생깁니다. 새로운 인물이라든가, 새로운 사건 같은 것이 생기기 때문에 취재를 충실히 하는 편이에요. 취재하고 현장에 직접 가보면서 점점 그림을 그려가는 거예요. <오로라 상회의 집사들> 같은 경우 소설의 배경이 되는 오로라 아파트는 제가 오랫동안 살았던 아파트였고 노량진 역시 4년 정도 살았던 곳이에요. 아무래도 충실한 취재가 소설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것 같아요. 그리고 자료 조사가 끝나면 스토리 구상에 들어가는데 소설을 쓸 때면 하루 종일 그 생각만 가득해요. 가끔은 꿈도 꿀 정도죠. 그렇게 하루 종일 생각하기 때문인지 노트북을 펼치면 바로 쓰는 편이에요.
Q.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작가님의 캐릭터와 가장 비슷한 인물로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요?
모든 인물마다 조금씩 저나 제 주변 인물이 조금씩 들어갈 수는 있지만 이게 바로 나야 할 인물은 없어요. 내가 겪은 일이 작은 에피소드로 들어갈 때가 있지만 제가 겪은 큰 사건은 별로 들어가지 않은 허구요. 예를 들어 아이가 초등학교 때 숙제를 해야 하는데 제가 마감 때문에 새벽녘에야 집에 들어왔던 적이 있어요. 아이가 자고 있어서 깨우기가 안쓰럽더라고요. 그래서 작은 목소리로 깨워보고 안 깨면 그냥 재워야겠다 했는데 아이가 벌떡 일어나는 거예요. 워킹맘으로서 아이의 그런 모습이 참 오래 기억에 남아서 소설에도 썼어요. 저는 어떤 인물에 대해서 잘 알고 이해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잘 알기 위해서 쓰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소설을 쓰면서 그 인물이나 그 삶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알아봐야 하는데 그것이 소설가가 해야 하는 책무가 아닐까 합니다. 알기 위해, 공감하기 위해 쓰다 보니 세상에 조금은 예전보다 너그러워진 면도 생긴 것 같아요.
소설을 중심으로 굴러가는 삶, 그래서 행복해요
Q. 소설가로서 사는 것은 어떤 건가요?
모든 것이 소설로 이어져요. 아프면 글을 못 쓸 테니까 건강도 챙기고, 친구를 만나는 시간도 거의 없어요. 친구를 만나면 좋지만, 그 후에 피곤함이 크니까 가급적 피하고 있어요. 또 친구들과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 그런지 재미가 없어요. 그 시간에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게 더 좋거든요. 어떻게 보면 세상에 대해 인색해졌다고 할까? 하지만 늦게 시작한 만큼 더 집중하고 싶어서 최상의 컨디션인 시간을 소설 쓰는 데 투자하죠. 일단 새로운 작품을 시작하면 어느 정도 구상이 끝난 후부터 매일 원고지 10매를 쓰려고 노력합니다. 안 써져도 어떻게든 10매를 채우고, 너무 잘 써진 날이라도 10매에서 멈춥니다. 잘 써진다고 무리하면 그 다음날 그만큼 채우는 데 어려움이 생기더라고요. 달력에 제가 쓴 양을 체크하면서 반드시 지키려고 해요. 그래서 여행도 못 가요. 마치 고3 학생처럼 사는 거죠.
Q. 소설가가 되신 후 주위의 반응이 어땠나요?
지인들은 축하한다며 대견해하는 정도죠. 달라지는 것은 없어요. 아마 제가 식당을 냈어도 똑같은 반응이었을 거예요. 저를 작가로 처음 만나는 분들은 저를 소설가로 인정하고 대화를 하세요. 그런데 저는 그게 특별하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아요. 문학이나 예술이 대접받을 만한 가치는 있지만 그 일에 종사한다는 이유만으로 개인이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창작을 하는 사람이나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이나 모두 똑같은 노동이에요. 오히려 소설가로서의 직업은 경제적 보상이 훨씬 부족해요. 그래서 소설가 중 많은 사람이 소설을 쓰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파트 타임 일을 해요. 경제적 풍요로움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소비를 할 정도로만 벌어요. 풍요로움을 추구하게 되면 더 이상 소설에 투자할 시간이 없어지니까요.
Q. 소설가를 꿈꾸는 사람들을 위해 ‘이렇게 하면 소설가가 될 수 있다’라는 비법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비법이랄게 뭐 있나요? 성실하게, 꾸준히 습작을 하고 반드시 완성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소설을 시작한다는 분들을 만나보면 다들 자기 소설을 쓰고 있다고 하세요. 그런데 막상 완성된 소설을 보여달라고 하면 완성을 못했다고 해요. 그건 소설을 쓰는 게 아니에요. 요리랑 마찬가지인데요, 찌개를 끓일 때 끓이다 말면 그걸 먹을 수 있나요? 맛이 있든 없든 완성을 해야 상에 내놓을 수 있고 먹을 수 있어요. 소설도 마찬가지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을 내야 해요. 글을 한 편이라도 끝까지 밀고 나가서 써본 경험이 있어야 다음 글을 쓸 에너지를 얻는 것이거든요. 그리고 글은 쓸수록 더 좋은 글을 쓰게 되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잘 쓸까’를 고민할 시간에 그냥 계속 쓰라고 권하고 싶어요. 많이 쓰면 잘 쓰게 되는데 고민 없이 쓰면 저품질의 글을 계속 쓰게 돼요. 열심히 쓰다 보면 고민이 필요할 때가 와요. 그 고민의 순간을 놓치지 말고 글에 그 고민의 결과물을 담으려고 하면 또 한 단계 성장하는 거예요. 소설가의 첫 번째 자질은 성실함이 아닐까 싶어요.
Q. 소설가로서 다른 사람이 쓴 소설을 보면 어떠세요?
훌륭한 책을 보면 부럽죠. 저는 미국 작가 윌리엄 포크너를 좋아하는데요, 그의 작품 중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읽었을 때 경외감 같은 것이 들면서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렇게는 못 쓸 거라고 생각했어요. 또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도 대단한 작품이죠. 요즘은 방현석 선생님의 <범도>를 읽고 있는데 분량이 엄청난 책이에요. 각 600페이지 분량으로 2권인데 이 책을 읽으며 작가의 역량이라는 것에 대해 절감하게 됐어요. 홍범도 장군 이야기인데 역사적인 사실과 허구를 정말 기가 막히게 버무렸어요. 제가 감히 평가할 수 없을 정도라서 그냥 감탄을 연발하면서 읽고 있어요.
Q. 출간을 준비 중인 작품이 있나요?
네. 지금 교정지를 보고 있는데 올해 안에 나올 것 같아요. 제목은 <다정 모르는 세계>에요. 여기서 다정은 중의적인 뜻이 있어요. 제가 쓴 소설의 여자 주인공 이름이 다정인데, 그 다정을 의미하기도 하고 다정함을 뜻하기도 합니다. 또 다정이 모르는 세계라는 뜻도 있고 다정을 모르는 세계라고도 해석되고요. 8편의 단편을 모은 소설집이니까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을 거예요. 제가 책을 쓰는 이유는 독자들에게 위안이 됐으면 하는 바람과 감동과 재미를 전하고 싶어서예요.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재미와 감동 모두를 전하고 싶습니다.
Q. 끝으로 평생학습e음 독자들에게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배움에 대한 한 말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몸이 늙는 것을 뜻하지, 마음이나 정신까지 늙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간혹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접고 들어가는 부분이 있는데, 그건 마음이 늙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현명해진 것이 아닌가 싶어요. 비록 몸은 늙어가도 마음과 정신은 맑게 깨어있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평생학습이지 않을까요?
제가 소설가니까 소설로 한정해서 본다면 학습은 배우고 익히는 것인데 소설은 배우는 것보다 익히는 게 훨씬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앞에서 제가 끊임없이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그것은 습, 즉 익히는 것입니다. 작법 책 같은 것을 찾아보는 것은 배우는 것, 즉 학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보통 늙으면 고집이 세지고 편협해지는 경향이 있어요. 이건 마음까지 늙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성장하는 사람은 더 넓어지고 더 깊어집니다. 고집이 센 것과 의지가 강한 것은 다른 얘기인데 학습을 통해 의지가 강해지고 포용력이 생기고 마음이 넓어질 수 있어요. 그리고 이것은 오히려 늙는다 해도 할 수 있는 것이고 끊임없이 학습을 계속한다면 늙을수록 더 잘하게 될 거예요. 모두 나이 들면서 도달하고 싶은 것이 의지가 강해지고 넓어지고 싶어지는 것인데 어떤 경로로 그곳에 도달할 것인가는 각자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소설을 쓰면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고 누군가는 음악을 통해서, 누군가는 봉사를 통해서 그 길에 다다를 수 있을 거예요. 배움이나 학습이란 것이 책을 많이 읽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열심히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 아닐까 합니다. 우리 열심히 할 수 있는 것을 찾으며 나이 들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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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평생학습e음 이선민 선임 에디터
사진 홍하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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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경란 작가의 작품을 관통하는 것은 소통과 이해를 통한 성장이다. 소설집 <빨간 치마를 입은 아이>나 장편소설 <오로라 상회의 집사들>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모두 소외된 사람들, 상처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이경란 작가는 함께 걸어가자고 손을 내민다. 사회적 소수에 대한 깊은 이해는 그녀의 삶의 여정에서 비롯됐을지도 모른다. 그녀 역시 잘 나가는 잡지사 기자로 지내다가 아이를 위해 직장을 그만두었던 경력단절여성이었다. 철야와 야근이 다반사여도 일은 재미있었는데 딸아이가 점점 학교에서 천덕꾸러기가 돼가는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직장생활을 10년 만에 접고, 그 아이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뒷바라지에 매진했다. 아이가 대학에 진학했을 때 자신의 인생을 살고자 소설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아이도 대학은 갔지만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고 어떤 꿈을 이루며 살아갈지 모르는 나이잖아요? 내가 무력하게, 우울하게 있으면서 아이한테는 ‘너는 꿈을 찾아서 살아라.’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고 포기하고 싶을 때 아이한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자는 마음으로 버텼어요. 나는 포기하면서 아이한테 포기하지 말고 뭐든지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게 7년 가까운 시간 동안 습작을 거듭하다 201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오늘의 루프탑>으로 등단했다. 등단 후 꾸준히 작품활동을 해 소설집 <빨간 치마를 입은 아이> <다섯 개의 예각>, 장편소설 <오로라 상회의 집사들> <마이 디어 송골매>를 펴냈다. 그중 <오로라 상회의 집사들>은 대만판, 태국판으로도 출간될 예정으로 작가로서의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나이 50이 넘어 작가에 도전하고 늦깎이 작가이지만 소설을 쓰며 더 깊고 넓은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다는 이경란 작가를 만나 소설가로서의 삶에 대해 들어보았다.
Q. 나이 들어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성공하는 경우가 많지 않잖아요?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해서 진짜 소설가가 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어떻게 해내셨어요?
해냈다기보다 그냥 열심히 썼어요. 처음 내가 나이 들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고민하다 글을 쓰는 것이 가장 경제적 부담이 없더라고요.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나만 열심히 하면 되는 게 바로 소설을 쓰는 일이더라고요. 소설가로 인정받기까지는 진입장벽이 굉장히 높지만, 습작을 하는 데는 진입장벽이 없다는 것도 있고요. 그래서 시작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막상 쓰기 시작했더니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제가 좋아서 하다 보니 7년 가까운 시간 동안 습작만 하면서 지냈어도 정말 행복했어요.
Q. 원래 글 쓰는 것을 좋아하셨나요?
아니에요. 습작하면서 제가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한 작품 한 작품 완성될 때마다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다음 작품을 또 쓰게 되고, 또 잘 쓰고 싶으니까 좋은 작품을 찾아서 읽게 되더라고요. 독서의 재미도 있어서 좋아하는 작품도 찾아 읽다 보면 자극을 받아서 더 열심히 쓰게 되는 것 같아요. 기자로 일할 때도 글을 썼지만, 그때는 마감 일정을 맞추느라 바빴고 돈 버는 데 도움이 되니까 한 거예요. 그때는 정말 항상 글을 쓰면서도 재미있다는 생각은 못 했어요. 그런데 제가 습작을 하던 내내 누구도, 어떤 것도 보상이 보장되지 않았는데도 글을 쓰는 자체를 즐기게 되더라고요. 마감도 없고 제 페이스대로 찬찬히 쓰고 싶은 이야기를 만들어 갈 수 있어서 그랬나 싶어요.
Q. 습작도 많이 하셨고 등단하신 후 벌써 4권의 책을 내셨는데요, 매번 다른 줄거리를 만드는 특별한 방법이 있나요?
저는 딱히 다음에 무엇을 쓸까 고민하지 않아요. 그냥 어느 날 이것이 소설이 될까? 한번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어요. 그런 순간이 있으면 그게 보통 소설까지 되는 편이에요. 처음 습작할 때 빼고는 쓸 게 없어서 막막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항상 쓰고 싶은 게 생겨서 지금 빨리 이걸 마무리하고 다음 이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오히려 계획을 세우면 오래 걸리는 것 같아요. 제가 고민해서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제 역량을 생각하지 않고 욕심을 부리게 돼서 그런 것 아닌가 싶더라고요. 제가 소설을 쓰겠다고 결심했을 때 계획한 소설은 아직도 완성을 못하고 쓰고 있어요. 제가 역량이 안 되는 것이었죠. 그래서 역량이 갖춰지면 다시 써야겠다 생각했다가 지금은 역량이 갖춰지기를 기다리지 말고 쓰자는 생각으로 바뀌었어요. 쓰다 보면 역량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다시 붙잡고 있는데 여전히 어려워요.
Q. <디어 마이 송골매>는 쓰는 데 12년이 걸렸다고 말씀하셨어요. 이렇게 오래 걸린 이유가 있으셨나요?
초고를 쓴 건 2011년이었어요. 우연히 보게 된 토크쇼에서 들은 한마디가 꽂혔죠. “저는 53년생입니다. 전쟁통에도 사랑이 있었습니다. 젊은이 여러분, 사랑하세요.” 그 말을 들은 순간 이걸 쓰자 싶더라고요. 좋아하고 잘 알고 재미있는 이야기. 송골매 재결합 콘서트를요. 제가 송골매 팬이었거든요. 처음에 단편으로 썼던 걸 몇 년 후에 매만지면서 중편이 됐다가 다시 단편이 됐다가 마침내 장편으로 탄생한 거예요. 이야기도 송골매 재결합 콘서트가 성사됐다가 되지 못했다가 다시 개최하기로 했다가 취소되고 버전이 계속 바뀌었어요. 그러다 2022년 진짜 송골매 재결합 콘서트가 열린 거예요. 수없이 고쳐 쓰고 던져두었다가 다시 꺼내 매만지는 과정이 지긋지긋하면서도 황홀했어요.
Q. 소설의 묘사가 굉장히 생생해서 묘사하신 공간이 머릿속에 그려질 정도입니다. 그런 섬세한 묘사를 할 수 있는 특별한 재주가 있으신 건가요?
한 주제가 떠오르면 그걸 쓰기 위해서 취재를 먼저 해요. 독자들이 소설을 읽을 때 디테일이 느껴져야 공감대가 넓어지거든요. 상상만으로 쓰면 현실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취재하다 보면 계속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생깁니다. 새로운 인물이라든가, 새로운 사건 같은 것이 생기기 때문에 취재를 충실히 하는 편이에요. 취재하고 현장에 직접 가보면서 점점 그림을 그려가는 거예요. <오로라 상회의 집사들> 같은 경우 소설의 배경이 되는 오로라 아파트는 제가 오랫동안 살았던 아파트였고 노량진 역시 4년 정도 살았던 곳이에요. 아무래도 충실한 취재가 소설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것 같아요. 그리고 자료 조사가 끝나면 스토리 구상에 들어가는데 소설을 쓸 때면 하루 종일 그 생각만 가득해요. 가끔은 꿈도 꿀 정도죠. 그렇게 하루 종일 생각하기 때문인지 노트북을 펼치면 바로 쓰는 편이에요.
Q.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작가님의 캐릭터와 가장 비슷한 인물로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요?
모든 인물마다 조금씩 저나 제 주변 인물이 조금씩 들어갈 수는 있지만 이게 바로 나야 할 인물은 없어요. 내가 겪은 일이 작은 에피소드로 들어갈 때가 있지만 제가 겪은 큰 사건은 별로 들어가지 않은 허구요. 예를 들어 아이가 초등학교 때 숙제를 해야 하는데 제가 마감 때문에 새벽녘에야 집에 들어왔던 적이 있어요. 아이가 자고 있어서 깨우기가 안쓰럽더라고요. 그래서 작은 목소리로 깨워보고 안 깨면 그냥 재워야겠다 했는데 아이가 벌떡 일어나는 거예요. 워킹맘으로서 아이의 그런 모습이 참 오래 기억에 남아서 소설에도 썼어요. 저는 어떤 인물에 대해서 잘 알고 이해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잘 알기 위해서 쓰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소설을 쓰면서 그 인물이나 그 삶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알아봐야 하는데 그것이 소설가가 해야 하는 책무가 아닐까 합니다. 알기 위해, 공감하기 위해 쓰다 보니 세상에 조금은 예전보다 너그러워진 면도 생긴 것 같아요.
Q. 소설가로서 사는 것은 어떤 건가요?
모든 것이 소설로 이어져요. 아프면 글을 못 쓸 테니까 건강도 챙기고, 친구를 만나는 시간도 거의 없어요. 친구를 만나면 좋지만, 그 후에 피곤함이 크니까 가급적 피하고 있어요. 또 친구들과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 그런지 재미가 없어요. 그 시간에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게 더 좋거든요. 어떻게 보면 세상에 대해 인색해졌다고 할까? 하지만 늦게 시작한 만큼 더 집중하고 싶어서 최상의 컨디션인 시간을 소설 쓰는 데 투자하죠. 일단 새로운 작품을 시작하면 어느 정도 구상이 끝난 후부터 매일 원고지 10매를 쓰려고 노력합니다. 안 써져도 어떻게든 10매를 채우고, 너무 잘 써진 날이라도 10매에서 멈춥니다. 잘 써진다고 무리하면 그 다음날 그만큼 채우는 데 어려움이 생기더라고요. 달력에 제가 쓴 양을 체크하면서 반드시 지키려고 해요. 그래서 여행도 못 가요. 마치 고3 학생처럼 사는 거죠.
Q. 소설가가 되신 후 주위의 반응이 어땠나요?
지인들은 축하한다며 대견해하는 정도죠. 달라지는 것은 없어요. 아마 제가 식당을 냈어도 똑같은 반응이었을 거예요. 저를 작가로 처음 만나는 분들은 저를 소설가로 인정하고 대화를 하세요. 그런데 저는 그게 특별하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아요. 문학이나 예술이 대접받을 만한 가치는 있지만 그 일에 종사한다는 이유만으로 개인이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창작을 하는 사람이나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이나 모두 똑같은 노동이에요. 오히려 소설가로서의 직업은 경제적 보상이 훨씬 부족해요. 그래서 소설가 중 많은 사람이 소설을 쓰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파트 타임 일을 해요. 경제적 풍요로움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소비를 할 정도로만 벌어요. 풍요로움을 추구하게 되면 더 이상 소설에 투자할 시간이 없어지니까요.
Q. 소설가를 꿈꾸는 사람들을 위해 ‘이렇게 하면 소설가가 될 수 있다’라는 비법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비법이랄게 뭐 있나요? 성실하게, 꾸준히 습작을 하고 반드시 완성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소설을 시작한다는 분들을 만나보면 다들 자기 소설을 쓰고 있다고 하세요. 그런데 막상 완성된 소설을 보여달라고 하면 완성을 못했다고 해요. 그건 소설을 쓰는 게 아니에요. 요리랑 마찬가지인데요, 찌개를 끓일 때 끓이다 말면 그걸 먹을 수 있나요? 맛이 있든 없든 완성을 해야 상에 내놓을 수 있고 먹을 수 있어요. 소설도 마찬가지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을 내야 해요. 글을 한 편이라도 끝까지 밀고 나가서 써본 경험이 있어야 다음 글을 쓸 에너지를 얻는 것이거든요. 그리고 글은 쓸수록 더 좋은 글을 쓰게 되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잘 쓸까’를 고민할 시간에 그냥 계속 쓰라고 권하고 싶어요. 많이 쓰면 잘 쓰게 되는데 고민 없이 쓰면 저품질의 글을 계속 쓰게 돼요. 열심히 쓰다 보면 고민이 필요할 때가 와요. 그 고민의 순간을 놓치지 말고 글에 그 고민의 결과물을 담으려고 하면 또 한 단계 성장하는 거예요. 소설가의 첫 번째 자질은 성실함이 아닐까 싶어요.
Q. 소설가로서 다른 사람이 쓴 소설을 보면 어떠세요?
훌륭한 책을 보면 부럽죠. 저는 미국 작가 윌리엄 포크너를 좋아하는데요, 그의 작품 중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읽었을 때 경외감 같은 것이 들면서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렇게는 못 쓸 거라고 생각했어요. 또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도 대단한 작품이죠. 요즘은 방현석 선생님의 <범도>를 읽고 있는데 분량이 엄청난 책이에요. 각 600페이지 분량으로 2권인데 이 책을 읽으며 작가의 역량이라는 것에 대해 절감하게 됐어요. 홍범도 장군 이야기인데 역사적인 사실과 허구를 정말 기가 막히게 버무렸어요. 제가 감히 평가할 수 없을 정도라서 그냥 감탄을 연발하면서 읽고 있어요.
Q. 출간을 준비 중인 작품이 있나요?
네. 지금 교정지를 보고 있는데 올해 안에 나올 것 같아요. 제목은 <다정 모르는 세계>에요. 여기서 다정은 중의적인 뜻이 있어요. 제가 쓴 소설의 여자 주인공 이름이 다정인데, 그 다정을 의미하기도 하고 다정함을 뜻하기도 합니다. 또 다정이 모르는 세계라는 뜻도 있고 다정을 모르는 세계라고도 해석되고요. 8편의 단편을 모은 소설집이니까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을 거예요. 제가 책을 쓰는 이유는 독자들에게 위안이 됐으면 하는 바람과 감동과 재미를 전하고 싶어서예요.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재미와 감동 모두를 전하고 싶습니다.
Q. 끝으로 평생학습e음 독자들에게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배움에 대한 한 말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몸이 늙는 것을 뜻하지, 마음이나 정신까지 늙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간혹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접고 들어가는 부분이 있는데, 그건 마음이 늙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현명해진 것이 아닌가 싶어요. 비록 몸은 늙어가도 마음과 정신은 맑게 깨어있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평생학습이지 않을까요?
제가 소설가니까 소설로 한정해서 본다면 학습은 배우고 익히는 것인데 소설은 배우는 것보다 익히는 게 훨씬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앞에서 제가 끊임없이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그것은 습, 즉 익히는 것입니다. 작법 책 같은 것을 찾아보는 것은 배우는 것, 즉 학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보통 늙으면 고집이 세지고 편협해지는 경향이 있어요. 이건 마음까지 늙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성장하는 사람은 더 넓어지고 더 깊어집니다. 고집이 센 것과 의지가 강한 것은 다른 얘기인데 학습을 통해 의지가 강해지고 포용력이 생기고 마음이 넓어질 수 있어요. 그리고 이것은 오히려 늙는다 해도 할 수 있는 것이고 끊임없이 학습을 계속한다면 늙을수록 더 잘하게 될 거예요. 모두 나이 들면서 도달하고 싶은 것이 의지가 강해지고 넓어지고 싶어지는 것인데 어떤 경로로 그곳에 도달할 것인가는 각자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소설을 쓰면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고 누군가는 음악을 통해서, 누군가는 봉사를 통해서 그 길에 다다를 수 있을 거예요. 배움이나 학습이란 것이 책을 많이 읽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열심히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 아닐까 합니다. 우리 열심히 할 수 있는 것을 찾으며 나이 들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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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평생학습e음 이선민 선임 에디터
사진 홍하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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