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음의 탐구생활] 푸르메재단 백경학 상임대표
[이음의 탐구생활]
각자의 분야에서 학습과 교육, 놀이, 예술 및 사회이슈 등을 통해 스스로 탐구하고 즐거움을 찾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만의 인사이트를 얻어가는 인터뷰 기획코너
사람들은 살면서 저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순간을 겪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고통을 겪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 고통을 견디느라 바쁘지, 이를 통해 무언가를 이루려고는 시도조차 못 한다. 그러나 백경학 푸르메 상임대표는 상상도 못 했던 고통의 시간을 자신의 인생뿐 아니라 수백, 수천의 운명을 바꾸는 삶으로 변화시켰다.
“아내가 교통사고로 죽을 뻔했던 고비를 넘길 때 저희 가족을 위해 기도했던 시간과 도움을 주었던 손길이 정말 많았습니다. 아내가 중증장애인이 되어 귀국한 후 국내에서 장애인 재활 치료가 얼마나 어려운 상황인지 온몸으로 느끼면서 우리 손으로 직접 환자 중심의 아름다운 병원을 만들자고 아내와 서로 약속했습니다.”
백경학 상임대표는 독일 유학 중 여행을 갔던 영국에서 아내가 한쪽 다리를 잃는 중증 장애를 입었다. 영국 스코틀랜드에 있던 병원의 시설은 우리나라 80년대 수준으로 낙후되어 보였지만 의사나 간호사가 환자를 대하는 방식은 ‘진정 선진국의 의료서비스를 받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곳의 의료서비스는 철저히 환자 중심이었다. 백 상임대표는 보호자가 환자의 상태에 대해 철저히 알 ‘권리’가 있다는 것을 그곳에서 배웠다.
“의사 1명과 간호사 6명이 제 아내에게 전담된 의료 인력이었습니다. 제가 아내의 얼굴을 닦아주기라도 할 때면 간호사가 달려와서 왜 자신이 할 일을 하냐며 타박했어요. 간병인이 없으면 중증 환자를 돌볼 수 없는 우리나라와는 완전히 딴판인 곳이었습니다. 또 의사는 제게 매일 같이 30분 넘게 아내의 상태에 대해 브리핑을 해줘서 오히려 제가 ‘선생님, 다른 환자를 돌봐야 하지 않으세요?’라고 물을 정도였어요.
그럴 때마다 의사는 제게 ‘당신의 아내가 가장 위독한 환자’라며 제게 환자의 상태를 알 권리가 있다고 강조해 주었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처음 들어본 말이었어요. 한국에서 의사에게 자세히 알려달라고 하면 아마도 바쁜 의사를 붙잡고 행패 부리는 보호자 취급을 받았을 텐데 거기서는 그것을 당연히 요구해야 할 권리라고 말하니 감동 그 자체였죠.”
환자의 가족 역시 영국의 의료진에게는 돌볼 대상이었다. 환자실 바로 옆에는 가족이 지낼 수 있는 안락한 방이 갖춰져 있어서 기다리는 데 불편이 없었다. 또 그 당시 일곱 살이었던 아이가 한 달 동안 유치원을 다닐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기 때문에 어려운 가운데서도 일상을 누릴 수 있게 했다. 독일로 병원을 옮겼을 때는 석 달 동안 누워만 있던 백 상임대표의 아내가 고통을 호소하는 데도 억지로 재활 기구에 세웠다. 잔인할 정도로 혹독했던 재활 치료는 환자가 퇴원 후 스스로 생활할 수 있는 최소한의 능력을 키우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경험을 하고 한국에 돌아온 부부는 재활병원에 입원한다는 것 자체가 하늘에 별 따기이고, 의료 인력이 환자를 돌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현실을 절감했다. 그러나 백 상임대표 부부는 열악한 현실에 절망하기는커녕 아예 한국에도 환자 중심의 재활병원을 짓자고 다짐했다.
그 후 백 대표는 잘 다니던 언론사를 그만두고 재단을 설립하기 위한 사업을 시작했다. 국내 최초 수제 맥주 양조장인 ‘옥토버훼스트’를 종로에 설립해 성공을 거둔 후 이곳의 지분 10%와 아내의 교통사고 보상금 절반을 더해 푸르메재단을 2005년 설립할 수 있었다.
재단을 설립한 후 민간 최초 장애인 전문 치과를 시작으로 장애인 재활치료센터, 장애인 복지관, 장애인 보호작업장을 운영했을 뿐 아니라 2016년 국내 최초 어린이전문재활병원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 설립, 2021년 국내 최초 청년 발달장애인을 위한 푸르메소셜팜 건립 등 끝없이 국내 최초의 기록을 경신하는 중이다. 책과 여행이 자신에게는 평생학습이라는 백경학 상임대표와 대한민국에서 장애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피와 술로 지어진 어린이전문재활병원
Q. 저서 <효자동 구텐백>을 읽으니, 영국과 독일의 의료서비스가 굉장히 인상 깊었습니다. 대표님께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어떤 부분이었나요?
독일의 재활병원에서는 혼자서 살아갈 방법을 체득할 수 있도록 훈련을 시켜요. 장애를 갖게 되더라도 어떻게든 홀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죠. 제 아내도 석 달 가까이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누워있었는데 독일 병원에 입원하자마자 곧바로 가혹한 재활 훈련을 시키더라고요.
처음에는 죽을 것처럼 괴로워했지만,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았던 아내가 스스로 휠체어를 타고 움직일 정도로 일상 복귀가 가능해졌어요. 치료가 끝나지 않았는데 강제로 퇴원시키는 일도 없었습니다. 병원 분위기도 차가운 것이 아니라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편안함이 있었어요.
한국에 돌아와서 아내가 입원할 재활병원을 찾는 것부터 수시로 병원을 옮겨야 하는 어려움은 기본이고 간병인 비용도 큰 부담이었습니다. 그 당시 월급은 몽땅 아내의 병원비로 들어갔던 것 같아요. 결국 우리나라는 모든 짐을 환자에게 넘기기 때문에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까지 있는 거예요. 아무리 인프라가 세계 최고 수준이더라도 환자가 장애를 입었을 때 마음 놓고 재활 치료를 받을 환경이 안 되는 우리나라 의료 환경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환자 중심의 병원을 꼭 만들고 싶었어요.
Q. 재단을 설립하고 장애인 치과, 어린이재활병원 등을 세우기까지 모든 것이 기적이었다고 하셨는데 어떤 면에서 기적이라고 하시는 건가요?
수백억 원이 드는 병원을 짓는다는 것은 기적이 아니었다면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었어요. 처음 재단을 만들어야 할 때는 아내의 보상금 10억 원과 옥토버페스트 지분 10%로 종잣돈을 마련할 수 있었고 그 후에도 정말 기적이 필요할 때면 누군가가 키다리 아저씨처럼 필요한 부분을 채워줬어요. 아마 전 세계적으로 시민들이 기부로 지은 병원은 우리 푸르메 어린이재활병원밖에 없을 거예요.
처음 재단을 설립할 때부터 전신화상을 입었던 이지선 씨, 소설가 고 박완서 씨, 기부천사 션 등등 많은 분이 재단에 힘을 보태주셨어요. 또 인근에 있는 초등학교 꼬마들부터 저희 장애인 치과에 치료를 받으러 왔던 수급자 아주머니도 매달 만 원씩 기부해 주실 정도로 정말 많은 분들이 참여해 주시고 계세요. 만 명이 넘는 기부자들이 정성과 땀, 그리고 마음을 모아서 두 개의 병원을 지을 수 있었어요. 이게 바로 기적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Q. 유럽에서 경험했던 의료서비스를 우리나라에서 구현하고자 어린이재활병원을 설립하셨는데요,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이 지금 입원 치료가 가능한 유일한 재활어린이 병원이죠?
맞습니다.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은 1만여 명의 시민과 500여 개 기업의 기부, 정부와 마포구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2016년 설립된 기적의 어린이재활병원입니다. 일일 500명, 연간 15만 명의 장애어린이와 지역주민을 치료하고 있는 우리 병원은 국내 최초이자 유일한 어린이전문재활병원이죠.
재활의학과, 정신건강의학과, 소아청소년과, 통합치과진료센터 등 4개 진료과의 긴밀한 협진으로 장애를 조기 진단하고, 장애어린이들이 제때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신체 · 인지 · 정서 영역에서 다양하고 체계적인 생애주기별 통합재활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한, 장애 · 비장애 소아청소년 진료를 통해 지역 주민으로부터 신뢰받는 의료기관이자, 장애어린이와 비장애어린이가 화합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Q. 어린이재활병원을 운영하는 데 어려움이 크다고 들었습니다.
어린이 재활병원은 구조적으로 적자를 볼 수밖에 없어요. 수익을 내려면 비싼 검사와 수술을 많이 해야 하는데 저희 어린이재활병원은 그런 게 있을 수 없거든요. 재활치료의 기본이 물리치료와 작업치료인데 수가가 굉장히 낮습니다. 치료할수록 적자가 나는 구조입니다. 그러다 보니 영국이나 독일에서처럼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어요.
하지만 최소한 우리 병원을 찾은 장애인 환자가 효과를 볼 때까지 최선을 다해 치료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전국에서 푸르메 재활병원에서 치료받기 위해 오는 분들이 많고 대기 중인 분도 많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가 어린이전문재활병원을 만든 후에 정부에서 우리 병원을 모범으로 삼아 권역별로 어린이전문재활병원을 짓기로 했다는 겁니다. 이렇게 조금씩 세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시작이 되었다는 점에서는 뿌듯함을 느끼고 있지요.
Q. 수익성이 나빠서 국내에 어린이재활병원이 드문가 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지금 저희 병원이 유일하지요. 그런데 상대적으로 일본에는 202개가 있고 미국에는 40개, 독일에는 140개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보바스 기념병원이나 인천 꾸러기병원이라는 어린이재활병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곳들이 의료보험 수가가 낮은 탓에 재정난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모두 문을 닫거나 축소하거나 전환했습니다.
어린이를 재활치료하려면 성인과 달리 일대일로 눈을 맞추고 치료해야 합니다. 성인은 기구 같은 것을 활용할 수도 있고, 이런저런 치료를 시키고 다른 사람을 치료할 수도 있어서 치료사 한 명이 동시에 여러 명을 치료할 수도 있지만 어린이는 그게 힘듭니다. 이런 것들에 대한 구조적인 지원책이라든가 아니면 의료보험 제도가 변화되지 않으면 악순환에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국가가 민간 병원에 대해서 도와줄 수 있는 법적인 근거가 없다고 해서 정부 지원은 아예 생각도 못 하고 있어요. 대신 후원해 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버티는 거죠.
재활에서 자활로…농업에서 치유의 길을 찾다
Q. 2020년에 청년 발달장애인을 위한 소셜팜을 만드셨는데 재활어린이에서 발달장애인으로 관심이 옮겨간 이유가 있나요?
재활치료를 받은 어린이들이 청년이 되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재활에서 자활로 관심이 옮겨간 거예요. 병원에서 잘 치료받고 열심히 학업을 마쳐도, 성인이 되면 갈 곳이 없어 또다시 집에서 24시간을 어머니와 지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런 발달장애인 청년들을 보면서 “조금만 끌어주면 독립할 수 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컸습니다. 장애아이를 둔 부모들의 최대 소원은 아이가 부모 도움 없이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다 네덜란드 스마트팜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오래된 작은 농장들을 개조해 암, 뇌졸중, 치매, 정신장애환자, 발달장애 청년을 보호하는 ‘케어팜’을 만들었더군요. 병원에 누워있는 것보다 자유롭게 농사짓고 닭 모이 주고 자연을 호흡하는 게 비용도 적게 들고 행복하다는 확신이 들었죠. 농사가 자폐나 발달장애 청년에게 정서적으로도 도움이 되지만 일자리로서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분야예요. 노지에서 일하기는 어렵지만 온도와 습도 등 농작물 재배 환경을 자동으로 조절해 주는 스마트팜이라면 장애 청년들도 충분히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됩니다.
Q. 푸르메 소셜팜이 여주에 조성되었는데 용지 마련부터 농장 조성까지 그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예. 이 역시 기적이 있어서 가능했어요. 발달장애 청년을 위한 소셜팜을 만들기 위한 캠페인을 시작했을 때 이상훈·장춘순 부부가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농장 부지 3,800평을 기부해 주셨습니다. 이분들 역시 발달장애 아들을 키우고 계셔서 저희 재단이 꿈꾸고 있는 농장에 관한 기사를 보고 장애 청년들이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농장을 만들어달라고 기부하신 거예요.
그렇게 부지를 마련하고 농장 건축에 필요한 자금은 여주 소셜팜 인근에 있던 SK하이닉스와 평범한 분들의 기부 등으로 메울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푸르메 소셜팜은 2020년 10월 29일 첫 삽을 뜬 지 2년여 만에 스마트팜, 베이커리 카페, 교육문화센터 등을 갖춘 장애 청년 농부들의 일터로 재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땅을 기부한 이상훈·장춘순 부부의 아들도 푸르메 소셜팜의 농부가 돼 친구들과 함께 출퇴근하며 일을 하고 계십니다.
Q. 농장 운영에는 어려움이 없나요?
농장 인근에 있는 SK하이닉스에서 건축비와 운영비를 도와줬고 농장에서 생산된 토마토와 버섯을 모두 사주는 등 큰 도움을 주고 있어요. 현재 55명의 장애 청년들이 하루 4시간 일하고 월급 100만 원을 받고 있습니다. 간혹 농장을 방문한 분들이 ‘외국인 노동자 4명을 고용하면 더 효율적이고 생산적일 텐데’라는 말을 하시곤 해요. 하지만 우린 생산성이 아니라 이곳에서 일하는 청년들의 행복을 원합니다. 그분들하고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다고 생각해요.
푸르메 소셜팜에서 일하는 청년들은 4시간 동안 일하고 나서 밥을 먹고 2시간 정도 수업을 듣습니다. 돈 쓰는 법, 꽃꽂이, 비즈공예, 탁구교실처럼 장애 청년들이 배우고 싶어 하거나 배워야 할 수업을 준비해서 듣게 합니다. 푸르메 소셜팜은 장애 청년들에게 단지 돈벌이를 위한 공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직장과 학교의 개념인 거예요.
Q. 일과 배움을 동시에 할 수 있다면 장애 청년들이 사회에 적응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겠네요.
월급 통장과 카드를 만들고 모르는 사람한테는 절대로 자기 신분증을 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비장애인들은 상식으로 알고 있지요. 하지만 장애 청년들은 이런 것들을 반복해서 알려주고 익숙해지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이런 것이 사는 데 정말 중요한 것이거든요.
장애 청년뿐 아니라 그 가족들도 농장에 대한 만족도가 높다 보니 농장에 들어오려고 지방에서 이사 오는 분들도 많아요. 지금 여섯 가족 정도가 여주로 이사 오셨고 보육원에 있던 친구들이 이곳에 취업하며 독립하기도 합니다. 자립 준비 청년들은 보육원에서 어떻게 나와야 할지 몰라서 막막했는데 이곳에 오며 독립할 수 있어 좋다고 말해요. 특히 장애를 가진 자립 준비 청년들은 사회에 진입하기가 더 어렵기 때문에 푸르메 소셜팜이 더 소중하게 느껴질 겁니다. 집에서 다니기 어려운 친구들을 위해서 아파트를 3채 얻어 기숙사처럼 쓰고 있는데 그 집을 가보면 반짝반짝해요. 어찌나 쓸고 닦는지, 과연 이 아이들이 부모와 떨어져 살 수 있을까 걱정하던 부모님들도 마음을 놓을 정도예요.
Q. 농장에서 일하는 장애 청년들이 많이 변화하는 것을 느끼시나 봐요.
그럼요. 지금은 그곳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저보다 사회성이 더 좋아요. 처음에는 눈도 안 마주치던 친구들이 지금은 먼저 다가와 인사를 하거나 사탕 같은 것을 주면서 ‘보고 싶었어요, 사랑해요’라고 말해줘요. 청년들은 또래집단을 통해 사회성을 배우게 된다는 것을 이 친구들이 확인해 준 셈이지요.
처음에는 집에서 부모님과 출퇴근하던 친구들도 셔틀버스로 출퇴근하는 친구들이 자기들끼리 웃고 떠드는 것을 보면서 부모님에게 자기도 혼자 가겠다고 해요. 그렇게 또래와 어울리는 법을 배우고 사회성을 키우면서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며 성장하고 있어요. 또 일자리와 월급이 그들에게 자존감을 높여줘요. 어느 어머님이 하신 말씀인데, ‘너 이거 왜 또 샀어? 하니 ’내가 번 돈이니 내가 알아서 쓸 거예요‘하더래요. 그 답을 듣고 그 부모님은 너무 행복하다고 하세요. 아이들이 자립하고 있다는 의미니까요.
장애인이 행복하면 모두가 행복하다
Q. 20년 가까이 장애인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힘써오셨는데 예전에 비해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고 느껴지시나요?
글쎄요. 우리나라의 경우 장애인 등록을 꺼리는 경우가 많아요. 장애인 등록이 낙인 효과를 가져오거나 형제자매가 불이익을 받을까 봐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외국에서는 암 수술을 받고 누워지내게 돼도 장애인 등록을 해요. 장애인이라고 해서 불이익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죠. 노화나 질병으로 인한 불편함도 모두 장애예요. 요즘 같은 100세 시대에는 장애인이 늘어날 수밖에 없겠죠.
유럽 같은 데는 사람들이 자식한테 재산을 물려주기보다 장애를 가진 친척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경우가 많아요. 장애인이 만든 작품은 비싸게 사주는 것이 당연하고요. 장애인이 만들었으니까 시혜적인 입장에서 돈을 더 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장애를 딛고 성과를 낸 것에 대해 가치를 더 크게 부여하는 것이에요. 제 생각에 장애인은 비장애인보다 생활이 불편할 뿐이지 사람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예전보다 나아졌다고는 해도 우리나라는 아직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강한 것 같아요. 푸르메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을 지을 때도 장애인시설이 들어서면 집값이 내려간다고 그 지역의 반대가 매우 컸습니다.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필요한데 아직도 장애인이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리고 집값이 사람의 가치보다 더 큰 게 아닌데 참 아쉽지요.
Q. 우리 사회가 아직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많이 갖고 있다는 말씀인 것 같은데, 이런 편견을 없애야 우리 사회가 더 건강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재단의 모토는 ‘장애인이 행복하면 모두가 행복하다.’입니다. 선진국은 장애인을 비장애인보다 열등하다고 여기지 않는 관용이 존재합니다. 우리나라처럼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심하면 장애를 갖고도 세계를 움직인 천재가 존재할 수 없을 겁니다. 예를 들어 수학과 물리학 분야에서 천재성을 보였지만 발달장애로 다른 사람들과 감정을 교류하며 관계를 유지하는 게 힘들었던 알버트 아인슈타인도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더라면 대학 입시와 대인 관계를 중시하는 직장생활에 실패해 폐인이 됐을 겁니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정치인으로 잘 나가던 서른아홉에 소아마비가 찾아와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 됐어요. 그런데 3년간의 재활 끝에 뉴욕 주지사에 당선되고 나중에 대통령까지 됩니다. 장애인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이런 도전을 못 했을 거예요.
요즘 전장연에서 이동권 보장을 위한 과격한 시위를 해서 불편하다는 분들이 많아요. 하지만 그분들 덕분에 지하철에 엘리베이터가 생겨서 장애인뿐만 아니라 유모차를 끄는 분들도 편리하게 다닐 수 있잖아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우러질 수 있는 사회가 되면 더 나은 사회가 더 빨리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다들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장애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일…사회적 안전망 구축이 절실하다
Q. 정말 숨 가쁘게 살아오셨는데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시나요?
푸르메 소셜팜같은 농장이 수도권에도 여러 개 만들어질 수 있도록 해보고 싶어요. 여주도 좋은 위치지만 여주에 사는 사람이 아니면 출퇴근하기에 어려움이 있거든요. 자유롭게 출퇴근할 수 있는 도시형 모델의 농장이 많아지면 더 많은 장애 청년들의 일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을 거예요.
푸르메 어린이재활병원을 모델로 권역별 어린이재활병원 건립이 국책사업이 된 것처럼, 푸르메 소셜팜도 정책 과제로 수용돼 전국으로 확대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고요. 그러기 위해서 여주의 푸르메 소셜팜을 자생력을 가진 성공모델로 잘 정착시키는 것이 지금 제게는 매우 중요한 과제입니다.
이 과제가 잘 되면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포괄적인 개념의 ‘푸르메 마을’을 만들고 싶어요. 하루 종일 행복하게 놀면서 일도 할 수 있는 마을요. 장애인이 보편적인 삶을 영위하려면 사업장, 쉼터, 캠핑장, 전시장, 공방 등 다양한 형태의 공간이 필요하거든요. 더 욕심을 낸다면 푸르메 병원과 농장 모델을 가난한 동남아 국가에 세워보는 일, 북한 장애어린이 재활을 돕는 일 같은 것도 해보고 싶습니다. 또 은퇴 후에는 아내와 여행도 다니고 글도 쓰고 싶어요.
Q. 하고 싶은 일이 많다는 것은 대표님이 아직도 열정이 넘친다는 의미라고 느껴집니다. 이런 열정을 유지하려면 무언가 자양분이 필요할 텐데요, 그중 하나가 평생학습일 것 같습니다. 평생학습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뭐라고 하시겠어요?
글쎄요. 책을 좋아하는 저에게 평생학습이란 책과 여행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요즘은 전자책도 많이 보지만 저는 종이가 갖는 고유의 느낌을 좋아해요. 좋아하는 구절에 밑줄을 치면서 보는 것, 그러면서 무언가를 배우고 느끼는 것, 그런 것이 평생학습이라고 할까요?
제 아내는 자기가 읽을 책에 줄을 치고 메모를 하기 위해 연필을 열심히 깎아요. 연필이 가지런히 놓인 것을 보면 큰 것도 있지만 몽당연필도 있어요. 짧은 연필을 볼펜에 끼워서 쓰는 몽당연필을 볼 때면 그렇게 짧아질 때까지 얼마나 많은 밑줄을 그은 것일까를 생각하며 경건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런 것이 평생 교육이다 싶기도 하고요.
Q. 끝으로 평생학습e음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 일을 하면서 장애라는 게 딱히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느꼈어요. 누구한테나 올 수 있는데 닥치기 전까지 느끼지 못하는 것일 뿐이에요. 누구나 다 장애인이 될 수 있는, 그런 불행들에 대해서 우리 사회가 공감하고 함께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장치와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가족 중의 한 명이 장애를 입더라도 한 가정의 몰락으로 가지 않도록 사회적 안전망을 갖춰야 하는 거죠.
아내가 사고를 당한 후 병원비부터 시작해 보험소송까지 수십억 원의 돈이 들어갔어요. 그런데 그 전에 보험료를 냈었던 것으로 충당했기 때문에 큰 부담이 없었어요. 우리 사회에 이런 문화가 자리 잡도록 함께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푸르메 재단에 기부도 해주시면 더욱 좋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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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평생학습e음 이선민 선임 에디터
사진 강민구 (스튜디오보일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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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살면서 저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순간을 겪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고통을 겪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 고통을 견디느라 바쁘지, 이를 통해 무언가를 이루려고는 시도조차 못 한다. 그러나 백경학 푸르메 상임대표는 상상도 못 했던 고통의 시간을 자신의 인생뿐 아니라 수백, 수천의 운명을 바꾸는 삶으로 변화시켰다.
“아내가 교통사고로 죽을 뻔했던 고비를 넘길 때 저희 가족을 위해 기도했던 시간과 도움을 주었던 손길이 정말 많았습니다. 아내가 중증장애인이 되어 귀국한 후 국내에서 장애인 재활 치료가 얼마나 어려운 상황인지 온몸으로 느끼면서 우리 손으로 직접 환자 중심의 아름다운 병원을 만들자고 아내와 서로 약속했습니다.”
백경학 상임대표는 독일 유학 중 여행을 갔던 영국에서 아내가 한쪽 다리를 잃는 중증 장애를 입었다. 영국 스코틀랜드에 있던 병원의 시설은 우리나라 80년대 수준으로 낙후되어 보였지만 의사나 간호사가 환자를 대하는 방식은 ‘진정 선진국의 의료서비스를 받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곳의 의료서비스는 철저히 환자 중심이었다. 백 상임대표는 보호자가 환자의 상태에 대해 철저히 알 ‘권리’가 있다는 것을 그곳에서 배웠다.
“의사 1명과 간호사 6명이 제 아내에게 전담된 의료 인력이었습니다. 제가 아내의 얼굴을 닦아주기라도 할 때면 간호사가 달려와서 왜 자신이 할 일을 하냐며 타박했어요. 간병인이 없으면 중증 환자를 돌볼 수 없는 우리나라와는 완전히 딴판인 곳이었습니다. 또 의사는 제게 매일 같이 30분 넘게 아내의 상태에 대해 브리핑을 해줘서 오히려 제가 ‘선생님, 다른 환자를 돌봐야 하지 않으세요?’라고 물을 정도였어요.
그럴 때마다 의사는 제게 ‘당신의 아내가 가장 위독한 환자’라며 제게 환자의 상태를 알 권리가 있다고 강조해 주었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처음 들어본 말이었어요. 한국에서 의사에게 자세히 알려달라고 하면 아마도 바쁜 의사를 붙잡고 행패 부리는 보호자 취급을 받았을 텐데 거기서는 그것을 당연히 요구해야 할 권리라고 말하니 감동 그 자체였죠.”
환자의 가족 역시 영국의 의료진에게는 돌볼 대상이었다. 환자실 바로 옆에는 가족이 지낼 수 있는 안락한 방이 갖춰져 있어서 기다리는 데 불편이 없었다. 또 그 당시 일곱 살이었던 아이가 한 달 동안 유치원을 다닐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기 때문에 어려운 가운데서도 일상을 누릴 수 있게 했다. 독일로 병원을 옮겼을 때는 석 달 동안 누워만 있던 백 상임대표의 아내가 고통을 호소하는 데도 억지로 재활 기구에 세웠다. 잔인할 정도로 혹독했던 재활 치료는 환자가 퇴원 후 스스로 생활할 수 있는 최소한의 능력을 키우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경험을 하고 한국에 돌아온 부부는 재활병원에 입원한다는 것 자체가 하늘에 별 따기이고, 의료 인력이 환자를 돌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현실을 절감했다. 그러나 백 상임대표 부부는 열악한 현실에 절망하기는커녕 아예 한국에도 환자 중심의 재활병원을 짓자고 다짐했다.
그 후 백 대표는 잘 다니던 언론사를 그만두고 재단을 설립하기 위한 사업을 시작했다. 국내 최초 수제 맥주 양조장인 ‘옥토버훼스트’를 종로에 설립해 성공을 거둔 후 이곳의 지분 10%와 아내의 교통사고 보상금 절반을 더해 푸르메재단을 2005년 설립할 수 있었다.
재단을 설립한 후 민간 최초 장애인 전문 치과를 시작으로 장애인 재활치료센터, 장애인 복지관, 장애인 보호작업장을 운영했을 뿐 아니라 2016년 국내 최초 어린이전문재활병원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 설립, 2021년 국내 최초 청년 발달장애인을 위한 푸르메소셜팜 건립 등 끝없이 국내 최초의 기록을 경신하는 중이다. 책과 여행이 자신에게는 평생학습이라는 백경학 상임대표와 대한민국에서 장애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Q. 저서 <효자동 구텐백>을 읽으니, 영국과 독일의 의료서비스가 굉장히 인상 깊었습니다. 대표님께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어떤 부분이었나요?
독일의 재활병원에서는 혼자서 살아갈 방법을 체득할 수 있도록 훈련을 시켜요. 장애를 갖게 되더라도 어떻게든 홀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죠. 제 아내도 석 달 가까이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누워있었는데 독일 병원에 입원하자마자 곧바로 가혹한 재활 훈련을 시키더라고요.
처음에는 죽을 것처럼 괴로워했지만,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았던 아내가 스스로 휠체어를 타고 움직일 정도로 일상 복귀가 가능해졌어요. 치료가 끝나지 않았는데 강제로 퇴원시키는 일도 없었습니다. 병원 분위기도 차가운 것이 아니라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편안함이 있었어요.
한국에 돌아와서 아내가 입원할 재활병원을 찾는 것부터 수시로 병원을 옮겨야 하는 어려움은 기본이고 간병인 비용도 큰 부담이었습니다. 그 당시 월급은 몽땅 아내의 병원비로 들어갔던 것 같아요. 결국 우리나라는 모든 짐을 환자에게 넘기기 때문에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까지 있는 거예요. 아무리 인프라가 세계 최고 수준이더라도 환자가 장애를 입었을 때 마음 놓고 재활 치료를 받을 환경이 안 되는 우리나라 의료 환경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환자 중심의 병원을 꼭 만들고 싶었어요.
Q. 재단을 설립하고 장애인 치과, 어린이재활병원 등을 세우기까지 모든 것이 기적이었다고 하셨는데 어떤 면에서 기적이라고 하시는 건가요?
수백억 원이 드는 병원을 짓는다는 것은 기적이 아니었다면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었어요. 처음 재단을 만들어야 할 때는 아내의 보상금 10억 원과 옥토버페스트 지분 10%로 종잣돈을 마련할 수 있었고 그 후에도 정말 기적이 필요할 때면 누군가가 키다리 아저씨처럼 필요한 부분을 채워줬어요. 아마 전 세계적으로 시민들이 기부로 지은 병원은 우리 푸르메 어린이재활병원밖에 없을 거예요.
처음 재단을 설립할 때부터 전신화상을 입었던 이지선 씨, 소설가 고 박완서 씨, 기부천사 션 등등 많은 분이 재단에 힘을 보태주셨어요. 또 인근에 있는 초등학교 꼬마들부터 저희 장애인 치과에 치료를 받으러 왔던 수급자 아주머니도 매달 만 원씩 기부해 주실 정도로 정말 많은 분들이 참여해 주시고 계세요. 만 명이 넘는 기부자들이 정성과 땀, 그리고 마음을 모아서 두 개의 병원을 지을 수 있었어요. 이게 바로 기적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Q. 유럽에서 경험했던 의료서비스를 우리나라에서 구현하고자 어린이재활병원을 설립하셨는데요,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이 지금 입원 치료가 가능한 유일한 재활어린이 병원이죠?
맞습니다.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은 1만여 명의 시민과 500여 개 기업의 기부, 정부와 마포구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2016년 설립된 기적의 어린이재활병원입니다. 일일 500명, 연간 15만 명의 장애어린이와 지역주민을 치료하고 있는 우리 병원은 국내 최초이자 유일한 어린이전문재활병원이죠.
재활의학과, 정신건강의학과, 소아청소년과, 통합치과진료센터 등 4개 진료과의 긴밀한 협진으로 장애를 조기 진단하고, 장애어린이들이 제때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신체 · 인지 · 정서 영역에서 다양하고 체계적인 생애주기별 통합재활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한, 장애 · 비장애 소아청소년 진료를 통해 지역 주민으로부터 신뢰받는 의료기관이자, 장애어린이와 비장애어린이가 화합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Q. 어린이재활병원을 운영하는 데 어려움이 크다고 들었습니다.
어린이 재활병원은 구조적으로 적자를 볼 수밖에 없어요. 수익을 내려면 비싼 검사와 수술을 많이 해야 하는데 저희 어린이재활병원은 그런 게 있을 수 없거든요. 재활치료의 기본이 물리치료와 작업치료인데 수가가 굉장히 낮습니다. 치료할수록 적자가 나는 구조입니다. 그러다 보니 영국이나 독일에서처럼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어요.
하지만 최소한 우리 병원을 찾은 장애인 환자가 효과를 볼 때까지 최선을 다해 치료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전국에서 푸르메 재활병원에서 치료받기 위해 오는 분들이 많고 대기 중인 분도 많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가 어린이전문재활병원을 만든 후에 정부에서 우리 병원을 모범으로 삼아 권역별로 어린이전문재활병원을 짓기로 했다는 겁니다. 이렇게 조금씩 세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시작이 되었다는 점에서는 뿌듯함을 느끼고 있지요.
Q. 수익성이 나빠서 국내에 어린이재활병원이 드문가 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지금 저희 병원이 유일하지요. 그런데 상대적으로 일본에는 202개가 있고 미국에는 40개, 독일에는 140개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보바스 기념병원이나 인천 꾸러기병원이라는 어린이재활병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곳들이 의료보험 수가가 낮은 탓에 재정난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모두 문을 닫거나 축소하거나 전환했습니다.
어린이를 재활치료하려면 성인과 달리 일대일로 눈을 맞추고 치료해야 합니다. 성인은 기구 같은 것을 활용할 수도 있고, 이런저런 치료를 시키고 다른 사람을 치료할 수도 있어서 치료사 한 명이 동시에 여러 명을 치료할 수도 있지만 어린이는 그게 힘듭니다. 이런 것들에 대한 구조적인 지원책이라든가 아니면 의료보험 제도가 변화되지 않으면 악순환에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국가가 민간 병원에 대해서 도와줄 수 있는 법적인 근거가 없다고 해서 정부 지원은 아예 생각도 못 하고 있어요. 대신 후원해 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버티는 거죠.
Q. 2020년에 청년 발달장애인을 위한 소셜팜을 만드셨는데 재활어린이에서 발달장애인으로 관심이 옮겨간 이유가 있나요?
재활치료를 받은 어린이들이 청년이 되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재활에서 자활로 관심이 옮겨간 거예요. 병원에서 잘 치료받고 열심히 학업을 마쳐도, 성인이 되면 갈 곳이 없어 또다시 집에서 24시간을 어머니와 지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런 발달장애인 청년들을 보면서 “조금만 끌어주면 독립할 수 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컸습니다. 장애아이를 둔 부모들의 최대 소원은 아이가 부모 도움 없이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다 네덜란드 스마트팜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오래된 작은 농장들을 개조해 암, 뇌졸중, 치매, 정신장애환자, 발달장애 청년을 보호하는 ‘케어팜’을 만들었더군요. 병원에 누워있는 것보다 자유롭게 농사짓고 닭 모이 주고 자연을 호흡하는 게 비용도 적게 들고 행복하다는 확신이 들었죠. 농사가 자폐나 발달장애 청년에게 정서적으로도 도움이 되지만 일자리로서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분야예요. 노지에서 일하기는 어렵지만 온도와 습도 등 농작물 재배 환경을 자동으로 조절해 주는 스마트팜이라면 장애 청년들도 충분히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됩니다.
Q. 푸르메 소셜팜이 여주에 조성되었는데 용지 마련부터 농장 조성까지 그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예. 이 역시 기적이 있어서 가능했어요. 발달장애 청년을 위한 소셜팜을 만들기 위한 캠페인을 시작했을 때 이상훈·장춘순 부부가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농장 부지 3,800평을 기부해 주셨습니다. 이분들 역시 발달장애 아들을 키우고 계셔서 저희 재단이 꿈꾸고 있는 농장에 관한 기사를 보고 장애 청년들이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농장을 만들어달라고 기부하신 거예요.
그렇게 부지를 마련하고 농장 건축에 필요한 자금은 여주 소셜팜 인근에 있던 SK하이닉스와 평범한 분들의 기부 등으로 메울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푸르메 소셜팜은 2020년 10월 29일 첫 삽을 뜬 지 2년여 만에 스마트팜, 베이커리 카페, 교육문화센터 등을 갖춘 장애 청년 농부들의 일터로 재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땅을 기부한 이상훈·장춘순 부부의 아들도 푸르메 소셜팜의 농부가 돼 친구들과 함께 출퇴근하며 일을 하고 계십니다.
Q. 농장 운영에는 어려움이 없나요?
농장 인근에 있는 SK하이닉스에서 건축비와 운영비를 도와줬고 농장에서 생산된 토마토와 버섯을 모두 사주는 등 큰 도움을 주고 있어요. 현재 55명의 장애 청년들이 하루 4시간 일하고 월급 100만 원을 받고 있습니다. 간혹 농장을 방문한 분들이 ‘외국인 노동자 4명을 고용하면 더 효율적이고 생산적일 텐데’라는 말을 하시곤 해요. 하지만 우린 생산성이 아니라 이곳에서 일하는 청년들의 행복을 원합니다. 그분들하고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다고 생각해요.
푸르메 소셜팜에서 일하는 청년들은 4시간 동안 일하고 나서 밥을 먹고 2시간 정도 수업을 듣습니다. 돈 쓰는 법, 꽃꽂이, 비즈공예, 탁구교실처럼 장애 청년들이 배우고 싶어 하거나 배워야 할 수업을 준비해서 듣게 합니다. 푸르메 소셜팜은 장애 청년들에게 단지 돈벌이를 위한 공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직장과 학교의 개념인 거예요.
Q. 일과 배움을 동시에 할 수 있다면 장애 청년들이 사회에 적응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겠네요.
월급 통장과 카드를 만들고 모르는 사람한테는 절대로 자기 신분증을 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비장애인들은 상식으로 알고 있지요. 하지만 장애 청년들은 이런 것들을 반복해서 알려주고 익숙해지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이런 것이 사는 데 정말 중요한 것이거든요.
장애 청년뿐 아니라 그 가족들도 농장에 대한 만족도가 높다 보니 농장에 들어오려고 지방에서 이사 오는 분들도 많아요. 지금 여섯 가족 정도가 여주로 이사 오셨고 보육원에 있던 친구들이 이곳에 취업하며 독립하기도 합니다. 자립 준비 청년들은 보육원에서 어떻게 나와야 할지 몰라서 막막했는데 이곳에 오며 독립할 수 있어 좋다고 말해요. 특히 장애를 가진 자립 준비 청년들은 사회에 진입하기가 더 어렵기 때문에 푸르메 소셜팜이 더 소중하게 느껴질 겁니다. 집에서 다니기 어려운 친구들을 위해서 아파트를 3채 얻어 기숙사처럼 쓰고 있는데 그 집을 가보면 반짝반짝해요. 어찌나 쓸고 닦는지, 과연 이 아이들이 부모와 떨어져 살 수 있을까 걱정하던 부모님들도 마음을 놓을 정도예요.
Q. 농장에서 일하는 장애 청년들이 많이 변화하는 것을 느끼시나 봐요.
그럼요. 지금은 그곳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저보다 사회성이 더 좋아요. 처음에는 눈도 안 마주치던 친구들이 지금은 먼저 다가와 인사를 하거나 사탕 같은 것을 주면서 ‘보고 싶었어요, 사랑해요’라고 말해줘요. 청년들은 또래집단을 통해 사회성을 배우게 된다는 것을 이 친구들이 확인해 준 셈이지요.
처음에는 집에서 부모님과 출퇴근하던 친구들도 셔틀버스로 출퇴근하는 친구들이 자기들끼리 웃고 떠드는 것을 보면서 부모님에게 자기도 혼자 가겠다고 해요. 그렇게 또래와 어울리는 법을 배우고 사회성을 키우면서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며 성장하고 있어요. 또 일자리와 월급이 그들에게 자존감을 높여줘요. 어느 어머님이 하신 말씀인데, ‘너 이거 왜 또 샀어? 하니 ’내가 번 돈이니 내가 알아서 쓸 거예요‘하더래요. 그 답을 듣고 그 부모님은 너무 행복하다고 하세요. 아이들이 자립하고 있다는 의미니까요.
Q. 20년 가까이 장애인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힘써오셨는데 예전에 비해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고 느껴지시나요?
글쎄요. 우리나라의 경우 장애인 등록을 꺼리는 경우가 많아요. 장애인 등록이 낙인 효과를 가져오거나 형제자매가 불이익을 받을까 봐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외국에서는 암 수술을 받고 누워지내게 돼도 장애인 등록을 해요. 장애인이라고 해서 불이익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죠. 노화나 질병으로 인한 불편함도 모두 장애예요. 요즘 같은 100세 시대에는 장애인이 늘어날 수밖에 없겠죠.
유럽 같은 데는 사람들이 자식한테 재산을 물려주기보다 장애를 가진 친척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경우가 많아요. 장애인이 만든 작품은 비싸게 사주는 것이 당연하고요. 장애인이 만들었으니까 시혜적인 입장에서 돈을 더 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장애를 딛고 성과를 낸 것에 대해 가치를 더 크게 부여하는 것이에요. 제 생각에 장애인은 비장애인보다 생활이 불편할 뿐이지 사람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예전보다 나아졌다고는 해도 우리나라는 아직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강한 것 같아요. 푸르메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을 지을 때도 장애인시설이 들어서면 집값이 내려간다고 그 지역의 반대가 매우 컸습니다.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필요한데 아직도 장애인이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리고 집값이 사람의 가치보다 더 큰 게 아닌데 참 아쉽지요.
Q. 우리 사회가 아직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많이 갖고 있다는 말씀인 것 같은데, 이런 편견을 없애야 우리 사회가 더 건강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재단의 모토는 ‘장애인이 행복하면 모두가 행복하다.’입니다. 선진국은 장애인을 비장애인보다 열등하다고 여기지 않는 관용이 존재합니다. 우리나라처럼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심하면 장애를 갖고도 세계를 움직인 천재가 존재할 수 없을 겁니다. 예를 들어 수학과 물리학 분야에서 천재성을 보였지만 발달장애로 다른 사람들과 감정을 교류하며 관계를 유지하는 게 힘들었던 알버트 아인슈타인도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더라면 대학 입시와 대인 관계를 중시하는 직장생활에 실패해 폐인이 됐을 겁니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정치인으로 잘 나가던 서른아홉에 소아마비가 찾아와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 됐어요. 그런데 3년간의 재활 끝에 뉴욕 주지사에 당선되고 나중에 대통령까지 됩니다. 장애인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이런 도전을 못 했을 거예요.
요즘 전장연에서 이동권 보장을 위한 과격한 시위를 해서 불편하다는 분들이 많아요. 하지만 그분들 덕분에 지하철에 엘리베이터가 생겨서 장애인뿐만 아니라 유모차를 끄는 분들도 편리하게 다닐 수 있잖아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우러질 수 있는 사회가 되면 더 나은 사회가 더 빨리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다들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Q. 정말 숨 가쁘게 살아오셨는데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시나요?
푸르메 소셜팜같은 농장이 수도권에도 여러 개 만들어질 수 있도록 해보고 싶어요. 여주도 좋은 위치지만 여주에 사는 사람이 아니면 출퇴근하기에 어려움이 있거든요. 자유롭게 출퇴근할 수 있는 도시형 모델의 농장이 많아지면 더 많은 장애 청년들의 일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을 거예요.
푸르메 어린이재활병원을 모델로 권역별 어린이재활병원 건립이 국책사업이 된 것처럼, 푸르메 소셜팜도 정책 과제로 수용돼 전국으로 확대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고요. 그러기 위해서 여주의 푸르메 소셜팜을 자생력을 가진 성공모델로 잘 정착시키는 것이 지금 제게는 매우 중요한 과제입니다.
이 과제가 잘 되면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포괄적인 개념의 ‘푸르메 마을’을 만들고 싶어요. 하루 종일 행복하게 놀면서 일도 할 수 있는 마을요. 장애인이 보편적인 삶을 영위하려면 사업장, 쉼터, 캠핑장, 전시장, 공방 등 다양한 형태의 공간이 필요하거든요. 더 욕심을 낸다면 푸르메 병원과 농장 모델을 가난한 동남아 국가에 세워보는 일, 북한 장애어린이 재활을 돕는 일 같은 것도 해보고 싶습니다. 또 은퇴 후에는 아내와 여행도 다니고 글도 쓰고 싶어요.
Q. 하고 싶은 일이 많다는 것은 대표님이 아직도 열정이 넘친다는 의미라고 느껴집니다. 이런 열정을 유지하려면 무언가 자양분이 필요할 텐데요, 그중 하나가 평생학습일 것 같습니다. 평생학습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뭐라고 하시겠어요?
글쎄요. 책을 좋아하는 저에게 평생학습이란 책과 여행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요즘은 전자책도 많이 보지만 저는 종이가 갖는 고유의 느낌을 좋아해요. 좋아하는 구절에 밑줄을 치면서 보는 것, 그러면서 무언가를 배우고 느끼는 것, 그런 것이 평생학습이라고 할까요?
제 아내는 자기가 읽을 책에 줄을 치고 메모를 하기 위해 연필을 열심히 깎아요. 연필이 가지런히 놓인 것을 보면 큰 것도 있지만 몽당연필도 있어요. 짧은 연필을 볼펜에 끼워서 쓰는 몽당연필을 볼 때면 그렇게 짧아질 때까지 얼마나 많은 밑줄을 그은 것일까를 생각하며 경건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런 것이 평생 교육이다 싶기도 하고요.
Q. 끝으로 평생학습e음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 일을 하면서 장애라는 게 딱히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느꼈어요. 누구한테나 올 수 있는데 닥치기 전까지 느끼지 못하는 것일 뿐이에요. 누구나 다 장애인이 될 수 있는, 그런 불행들에 대해서 우리 사회가 공감하고 함께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장치와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가족 중의 한 명이 장애를 입더라도 한 가정의 몰락으로 가지 않도록 사회적 안전망을 갖춰야 하는 거죠.
아내가 사고를 당한 후 병원비부터 시작해 보험소송까지 수십억 원의 돈이 들어갔어요. 그런데 그 전에 보험료를 냈었던 것으로 충당했기 때문에 큰 부담이 없었어요. 우리 사회에 이런 문화가 자리 잡도록 함께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푸르메 재단에 기부도 해주시면 더욱 좋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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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평생학습e음 이선민 선임 에디터
사진 강민구 (스튜디오보일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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