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 대한민국 평생학습대상 대상(국무총리상) 수상한 김상호 씨
교육부가 주최하고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이 주관하는 대한민국 평생학습대상은 평생학습을 통해 지역사회에 공헌하고 있는 개인과 단체 등 모범사례를 발굴해 시상한다. 평생학습 실천과 배움 문화를 조성한 우수 사례의 발굴 및 확산을 위해 국가평생교육진흥원에서 주관하는 평생학습 분야의 유일한 시상식이다.
올해로 20회를 맞이한 대한민국 평생학습대상에서 김상호 씨가 대상을 수상했다.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며 끊임없이 배움의 열망을 불태우고 일흔의 나이에도 청춘처럼 살고 있는 김상호 씨는 호가 노노족이다. ‘No+老’, 즉 지금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늙지 않는 종족이라는 뜻이다. 대통령표창, 보국훈장 광복장, 사랑의책나누기운동본부 국방부 독서코칭 멘토대상, 새한일보 대한민국을 빛낸 자랑스런 인물대상 문화예술부문 시인대상 등 열심히 산 그를 증명하듯 그가 받은 상훈이 수두룩하다. 노노족의 모범을 보이며 나이와 상관없이 끊임없이 배움에 도전해온 김상호 씨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본다.
전쟁으로 인한 가난에 혹독하게 시달리다
김상호 씨는 6.25전쟁이 끝나고 휴전협정이 맺어진 해에 태어났다. 직업군인인 아버지가 근무하던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난 김 씨는 어릴 때부터 전쟁의 상흔으로 인한 가난에 시달렸다. 게다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부상을 입어 예편하고 집에 누워있었던 탓에 어머니는 남의 집 살이를 해야 해서 동생 넷과 아버지를 그가 거두어야 했다. 산에 가서 버섯도 따고 나무도 해다가 장에 가서 파느라 학교를 가지 못해 남들보다 1년 늦게 졸업했다. 당연히 중학교 진학은 꿈도 못 꾸는 상황이었다. 아버지는 중학교에 보내달라는 그에게 돈이 들지 않는 서당을 가라고 권유하셨다.
“그 당시 제 꿈은 중학교 입학이었습니다.
아버지 말씀을 따르면 언젠가는 보내주실 것이라 믿고 40릿길을 걸어야 하는 서당을 갈 때도 항상 책을 끼고 다녔어요.
방 곳곳에 ‘중학교 입학은 나의 꿈’이라는 문구를 붙여놓고 반드시 가겠다는 다짐을 했지요.”
그의 강한 의지에 부모님은 결국 중학교 진학을 허락하셨다. 우여곡절 끝에 중학교에 입학했던 그는 어려운 형편에 교복을 살 수 없었다. 어머니가 미군부대에서 나온 밀가루 포대를 까맣게 염색해 교복을 만들어 주셨다. 중학교 내내 그 교복 때문에 그는 친구들에게 놀림과 괴롭힘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올라와 구로공단 비철 주물공장에서 일했다. 당연히 그가 가장 노릇을 해야 했다. 다행히 사장님이 그가 일을 잘하고 머리가 좋다고 반장을 시켜주어 월급도 6000원으로 인상됐다.
“정말 열심히 일했더니 사장님이 기특해하시더라고요.
그런데 같이 일한 분들이 모두 저보다 나이가 많은 40대였어요.
제가 반장이라고 해도 다들 무시하고 구박을 했어요. 중학교 때부터 참 모질게 당했던 것 같아요.”
군대에 가게 됐을 때 그는 집에 돈을 보내기 위해 특전단 하사 모집에 지원해 직업 군인 생활을 시작했다. 9급 공무원 대접을 해줘서 월급도 15,000원이나 됐으니 주저할 것이 없었다.
맡기면 뭐든 해낸 도깨비, 배움의 길로 들어서다
그는 군 생활 중 초단기 진급으로 유명했다. 돈을 벌기 위해 악착같이 시키는 것은 다 해낸 덕분이다. 부사관으로서 장교 직무대리를 맡아 전투력 경연대회에서 자신의 부대를 최우수 부대로 끌어올릴 정도였다. 오죽하면 별명이 도깨비였다. 입대 5년 만에 상사를 달고 그 후 새로 생긴 계급인 2등 상사, 1등 상사, 원사 모두 1기로 임관했다.
그의 부대는 한미연합부대여서 영어를 할 사람이 필요했다. 주저하지 않고 도전해서 1년 만에 국군정보학교 영어 과정에 합격했다. 중학교만 졸업한 사람이 육사, ROTC 출신들을 제치고 합격했다고 해서 신문에 등장하기도 했다. 8개월간 집체교육을 받고 졸업 무렵 관광가이드 3급 통역사 자격증도 땄다. 그 후 부대에서 통역을 잘하는 사람으로 유명해졌지만 무엇이든 잘 해내는 도깨비였던 그도 중학교 졸업이라는 학력 때문에 열등감에 시달렸다.
“영어 공부를 하게 된 것은 제가 영어를 몰라서 연막탄이랑 가스탄을 읽지 못해 실수했던 적이 있어요.
그때 좌절하기보다 이제라도 영어를 공부하자고 결심했지요. 그런데 아이가 가져온 학교 가정통신문에 부모 학력을 적는 게 있었어요.
차마 중졸이라는 말을 못 해서 아이에게도 고졸이라고 거짓말을 했어요.
하지만 거짓말이 계속 걸려서 공부하기로 결심했지요”
제물포고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 입학에 성공한 후 3년 동안 열심히 공부한 끝에 내신 2등급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고졸 자격을 따냈다. 그의 나이 마흔이 넘어서였다. 그에게 또 다른 배움의 기회가 온 것이 바로 그때였다. 마침 그해 대한민국 국방부에 부사관들을 대상으로 하는 대학교 위탁교육제가 생긴 것이다. 지원에 필요한 서류는 고등학교 졸업장, 내신 성적, 근무인사고과. 만약 고등학교를 안 다녔다면 지원도 못했겠지만 이젠 고졸 자격을 갖추었기에 당당하게 지원했고 합격했다.
그렇게 유한전문대학교에 입학해 2년 동안 대학 생활을 즐겼다. 과대표를 맡았을 때 유한대학 설립자 유일한 박사 탄신 100주년이어서 모금활동을 벌여 유일한 박사 흉상을 건립하기도 했다. 졸업 후에는 민군 화합 차원에서 부천대학교와 유한대학교, 17사단, 9공수단이 결연하도록 주선했다. 그 결과 부대 내에 캠퍼스를 만들고 두 대학의 교수들이 강의를 함으로써 부대 내 군인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는 결실을 맺었다.
“저 같은 부사관들 중에는 고졸이 많았어요.
그런데 부대 내에 캠퍼스가 생기니까 그들도 전문대학교 배움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된 거예요.
제가 겪어봐서 알기 때문에 누구보다 열심히 캠퍼스 만들기에 나선 거죠.”
그는 부대 내에서 군인 상담도 맡았다. 자살을 하거나 탈영을 하는 이유가 힘든 훈련 때문만은 아니었다. 더 충실한 상담을 하고 싶었지만 스스로 상담능력이 부족하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다시 경희대학교 사이버 대학교에 편입해 사회복지학부에서 상담심리를 전공했다. 입학과 동시에 이라크에 파병을 가는 바람에 약간의 소동이 있었지만 그 정도의 역경은 그에게 문제가 되지 못했다.
배움이 나눔으로 이어져 기쁨이 배가 되다
군 생활하랴, 공부하랴 바쁜 그는 공부를 시작한 1989년부터 매일 새벽 2시 반에 일어나며 하루 4시간 이상 잠을 잔 적이 없다. 그리고 매일 일기를 썼는데 그 기간만 벌써 50년째다. 지금은 페이스북에 매일 새벽 일기를 쓴다.
“23살부터 썼던 일기장을 이사하면서 잃어버렸어요.
마침 그때 SNS가 대세였고 글자 수의 제한을 받지 않는 페이스북이 딱 좋더라고요.
13년째 쓰고 있는데 1년 단위로 책도 만들어줘서 기록하기가 참 좋아요.
그리고 전체 공개를 했더니 일거리가 생기더라고요.”
그는 군 제대 후 더욱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50년간 일기를 쓴 실력을 발휘해 시인으로 등단해 한국문학상 문학상, 림영창문학상 대상, 윤동주문학상 대상, 모산문학상 우수상, 세종문화예술대상 문학상, 월간 여울문학 최우수상 등 다양한 수상경력도 보유했다. 이 실력을 발휘해 시인대학에서 강사로 일하고 사랑의책나누기운동본부 국방부 독서코칭도 한다. 그리고 정년퇴임을 앞둔 2009년 아주대학교 경영대학원에 도전했다. 이 역시 국방부 위탁교육기관으로 지정되자마자 지원한 것이다.
“솔직히 공부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열심히 했죠.
그리고 졸업 후 아주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 과정 동문회장으로 추대받았어요. 연속 2기 동문회장으로 일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됐어요.
여담이지만 그 후 정치권에서 정치해보라는 권유도 많았지만 다 거절했어요.
저는 정치가 아니라 사람들과 무언가를 해내는 게 더 보람이 컸거든요.”
그는 자신이 사는 시흥지역에서 ‘시흥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단체를 활성화하는 데 적극 나섰다. 친목모임에 머물던 것을 법인으로 전환해서 자신이 상임대표를 맡아 봉사활동을 벌였다. 얼마 되지 않았던 회원 수가 1년 만에 1만 명이 넘었다. 연령대도 20대, 30대, 40대가 대부분이었다.
그는 젊은 층이 많다는 데 착안해 그들의 고민을 상담해주고 진로를 코칭해주기 위한 집단 코칭도 진행했다. 한 번 모임을 하면 20~30명이 모이기 때문에 모임을 가진 카페 입장에서는 대환영이었다. 김 씨는 자신의 단체가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핸드 셰이크 캠페인을 벌였다. 회원들이 핸드폰에 핸드 셰이크 로고를 부착한 후 같은 로고가 붙어 있는 매장에서 물건을 사면 5% 할인해주는 혜택을 부여했다. 지역 커뮤니티와 지역 경제가 윈윈하는 결과를 낳으며 큰 호응을 얻었다.
배움은 배신하지 않는다, 기회를 선물할 뿐
김 씨는 정년퇴임 후 봉사활동만 한 것은 아니다. HR 전문회사에 입사해서 다양한 교육을 기획하고 강사로 일했다.
“군대에서 알았던 중령이 예편하고 그 회사를 다녔어요. 커리어 컨설턴트를 해주는 회사인데 제가 쌓은 경력과 딱 일치하더라고요.
대학에서 상담을 전공했고 사회복지사 자격증, 상담심리사 자격증, 평생교육사 자격증 등등이 있으니까요.
게다가 석사 이상만 입사자격이 있는데 제가 마침 아주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니까 입사가 가능했던 겁니다.
평생학습을 통해 다양한 라이선스를 갖게 되면 이처럼 기회가 생긴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력을 살려 제대 군인들의 재취업을 위한 평생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퇴직자들이 사회에 적응하기 쉽도록 도울 뿐 아니라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한 것이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SM인재개발 평생교육원을 설립해 군 제대자들의 학습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고 변화 관리의 필요성을 교육하는 데도 앞장섰다.
“자신을 연마하고 준비하면 기회가 끊임없이 옵니다.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더니 저의 경력을 보고 강연을 요청하기도 하고 신문사에서 글을 기고해달라는 요청도 옵니다.
그리고 방송 출연도 하게 돼서 동네에 다니면 사람들이 알아보고 인사도 해요.”
KBS 시니어 토크쇼 황금연못에 ‘배움에 대한 열정’이란 주제로 출연해 배우고 조건을 갖추니 기회가 왔고, 배움에는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설파했다. 그 후 여러 방송에서 강사, 기업컨설팅, 라이프 코치, 시인, 배우,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약하고 있다. 또한 학생, 기업, 군부대 등 다양한 기관에서 3만 회가 넘는 강연을 하는 스타강사이기도 하다. 7개의 자격증을 가진 그는 최근 요양보호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편찮으신 부모님을 직접 간병하기 위해서다.
“제게 평생학습이란 생명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마침표를 찍는 순간 죽는 거예요.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바로 배움이니까 평생학습이 제게는 생명으로 다가와요.
갈수록 사회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데 배우지 않으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제가 평생학습을 하면서 느낀 한 가지는 배움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김 씨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춰 국제 환경청년연합회의 수석자문위원을 맡았다고 밝혔다. 이젠 환경과 기술을 알아야 하고 ESG에 걸맞은 활동을 펼쳐야 한다며 또 다른 평생학습의 길로 들어서는 중이란다. ‘인생에 기회가 세 번 온다’는 말은 잘못됐다며 조건을 갖추고 준비해두면 수많은 기회가 오고 평생 청춘처럼 열정적으로 살 수 있다는 김상호 씨. 그의 다음 활약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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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평생학습e음 이선민 선임 에디터
사진 강민구
제20회 대한민국 평생학습대상 대상(국무총리상) 수상한 김상호 씨
교육부가 주최하고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이 주관하는 대한민국 평생학습대상은 평생학습을 통해 지역사회에 공헌하고 있는 개인과 단체 등 모범사례를 발굴해 시상한다. 평생학습 실천과 배움 문화를 조성한 우수 사례의 발굴 및 확산을 위해 국가평생교육진흥원에서 주관하는 평생학습 분야의 유일한 시상식이다.
올해로 20회를 맞이한 대한민국 평생학습대상에서 김상호 씨가 대상을 수상했다.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며 끊임없이 배움의 열망을 불태우고 일흔의 나이에도 청춘처럼 살고 있는 김상호 씨는 호가 노노족이다. ‘No+老’, 즉 지금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늙지 않는 종족이라는 뜻이다. 대통령표창, 보국훈장 광복장, 사랑의책나누기운동본부 국방부 독서코칭 멘토대상, 새한일보 대한민국을 빛낸 자랑스런 인물대상 문화예술부문 시인대상 등 열심히 산 그를 증명하듯 그가 받은 상훈이 수두룩하다. 노노족의 모범을 보이며 나이와 상관없이 끊임없이 배움에 도전해온 김상호 씨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본다.
김상호 씨는 6.25전쟁이 끝나고 휴전협정이 맺어진 해에 태어났다. 직업군인인 아버지가 근무하던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난 김 씨는 어릴 때부터 전쟁의 상흔으로 인한 가난에 시달렸다. 게다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부상을 입어 예편하고 집에 누워있었던 탓에 어머니는 남의 집 살이를 해야 해서 동생 넷과 아버지를 그가 거두어야 했다. 산에 가서 버섯도 따고 나무도 해다가 장에 가서 파느라 학교를 가지 못해 남들보다 1년 늦게 졸업했다. 당연히 중학교 진학은 꿈도 못 꾸는 상황이었다. 아버지는 중학교에 보내달라는 그에게 돈이 들지 않는 서당을 가라고 권유하셨다.
“그 당시 제 꿈은 중학교 입학이었습니다.
아버지 말씀을 따르면 언젠가는 보내주실 것이라 믿고 40릿길을 걸어야 하는 서당을 갈 때도 항상 책을 끼고 다녔어요.
방 곳곳에 ‘중학교 입학은 나의 꿈’이라는 문구를 붙여놓고 반드시 가겠다는 다짐을 했지요.”
그의 강한 의지에 부모님은 결국 중학교 진학을 허락하셨다. 우여곡절 끝에 중학교에 입학했던 그는 어려운 형편에 교복을 살 수 없었다. 어머니가 미군부대에서 나온 밀가루 포대를 까맣게 염색해 교복을 만들어 주셨다. 중학교 내내 그 교복 때문에 그는 친구들에게 놀림과 괴롭힘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올라와 구로공단 비철 주물공장에서 일했다. 당연히 그가 가장 노릇을 해야 했다. 다행히 사장님이 그가 일을 잘하고 머리가 좋다고 반장을 시켜주어 월급도 6000원으로 인상됐다.
“정말 열심히 일했더니 사장님이 기특해하시더라고요.
그런데 같이 일한 분들이 모두 저보다 나이가 많은 40대였어요.
제가 반장이라고 해도 다들 무시하고 구박을 했어요. 중학교 때부터 참 모질게 당했던 것 같아요.”
군대에 가게 됐을 때 그는 집에 돈을 보내기 위해 특전단 하사 모집에 지원해 직업 군인 생활을 시작했다. 9급 공무원 대접을 해줘서 월급도 15,000원이나 됐으니 주저할 것이 없었다.
그는 군 생활 중 초단기 진급으로 유명했다. 돈을 벌기 위해 악착같이 시키는 것은 다 해낸 덕분이다. 부사관으로서 장교 직무대리를 맡아 전투력 경연대회에서 자신의 부대를 최우수 부대로 끌어올릴 정도였다. 오죽하면 별명이 도깨비였다. 입대 5년 만에 상사를 달고 그 후 새로 생긴 계급인 2등 상사, 1등 상사, 원사 모두 1기로 임관했다.
그의 부대는 한미연합부대여서 영어를 할 사람이 필요했다. 주저하지 않고 도전해서 1년 만에 국군정보학교 영어 과정에 합격했다. 중학교만 졸업한 사람이 육사, ROTC 출신들을 제치고 합격했다고 해서 신문에 등장하기도 했다. 8개월간 집체교육을 받고 졸업 무렵 관광가이드 3급 통역사 자격증도 땄다. 그 후 부대에서 통역을 잘하는 사람으로 유명해졌지만 무엇이든 잘 해내는 도깨비였던 그도 중학교 졸업이라는 학력 때문에 열등감에 시달렸다.
“영어 공부를 하게 된 것은 제가 영어를 몰라서 연막탄이랑 가스탄을 읽지 못해 실수했던 적이 있어요.
그때 좌절하기보다 이제라도 영어를 공부하자고 결심했지요. 그런데 아이가 가져온 학교 가정통신문에 부모 학력을 적는 게 있었어요.
차마 중졸이라는 말을 못 해서 아이에게도 고졸이라고 거짓말을 했어요.
하지만 거짓말이 계속 걸려서 공부하기로 결심했지요”
제물포고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 입학에 성공한 후 3년 동안 열심히 공부한 끝에 내신 2등급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고졸 자격을 따냈다. 그의 나이 마흔이 넘어서였다. 그에게 또 다른 배움의 기회가 온 것이 바로 그때였다. 마침 그해 대한민국 국방부에 부사관들을 대상으로 하는 대학교 위탁교육제가 생긴 것이다. 지원에 필요한 서류는 고등학교 졸업장, 내신 성적, 근무인사고과. 만약 고등학교를 안 다녔다면 지원도 못했겠지만 이젠 고졸 자격을 갖추었기에 당당하게 지원했고 합격했다.
그렇게 유한전문대학교에 입학해 2년 동안 대학 생활을 즐겼다. 과대표를 맡았을 때 유한대학 설립자 유일한 박사 탄신 100주년이어서 모금활동을 벌여 유일한 박사 흉상을 건립하기도 했다. 졸업 후에는 민군 화합 차원에서 부천대학교와 유한대학교, 17사단, 9공수단이 결연하도록 주선했다. 그 결과 부대 내에 캠퍼스를 만들고 두 대학의 교수들이 강의를 함으로써 부대 내 군인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는 결실을 맺었다.
“저 같은 부사관들 중에는 고졸이 많았어요.
그런데 부대 내에 캠퍼스가 생기니까 그들도 전문대학교 배움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된 거예요.
제가 겪어봐서 알기 때문에 누구보다 열심히 캠퍼스 만들기에 나선 거죠.”
그는 부대 내에서 군인 상담도 맡았다. 자살을 하거나 탈영을 하는 이유가 힘든 훈련 때문만은 아니었다. 더 충실한 상담을 하고 싶었지만 스스로 상담능력이 부족하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다시 경희대학교 사이버 대학교에 편입해 사회복지학부에서 상담심리를 전공했다. 입학과 동시에 이라크에 파병을 가는 바람에 약간의 소동이 있었지만 그 정도의 역경은 그에게 문제가 되지 못했다.
군 생활하랴, 공부하랴 바쁜 그는 공부를 시작한 1989년부터 매일 새벽 2시 반에 일어나며 하루 4시간 이상 잠을 잔 적이 없다. 그리고 매일 일기를 썼는데 그 기간만 벌써 50년째다. 지금은 페이스북에 매일 새벽 일기를 쓴다.
“23살부터 썼던 일기장을 이사하면서 잃어버렸어요.
마침 그때 SNS가 대세였고 글자 수의 제한을 받지 않는 페이스북이 딱 좋더라고요.
13년째 쓰고 있는데 1년 단위로 책도 만들어줘서 기록하기가 참 좋아요.
그리고 전체 공개를 했더니 일거리가 생기더라고요.”
그는 군 제대 후 더욱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50년간 일기를 쓴 실력을 발휘해 시인으로 등단해 한국문학상 문학상, 림영창문학상 대상, 윤동주문학상 대상, 모산문학상 우수상, 세종문화예술대상 문학상, 월간 여울문학 최우수상 등 다양한 수상경력도 보유했다. 이 실력을 발휘해 시인대학에서 강사로 일하고 사랑의책나누기운동본부 국방부 독서코칭도 한다. 그리고 정년퇴임을 앞둔 2009년 아주대학교 경영대학원에 도전했다. 이 역시 국방부 위탁교육기관으로 지정되자마자 지원한 것이다.
“솔직히 공부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열심히 했죠.
그리고 졸업 후 아주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 과정 동문회장으로 추대받았어요. 연속 2기 동문회장으로 일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됐어요.
여담이지만 그 후 정치권에서 정치해보라는 권유도 많았지만 다 거절했어요.
저는 정치가 아니라 사람들과 무언가를 해내는 게 더 보람이 컸거든요.”
그는 자신이 사는 시흥지역에서 ‘시흥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단체를 활성화하는 데 적극 나섰다. 친목모임에 머물던 것을 법인으로 전환해서 자신이 상임대표를 맡아 봉사활동을 벌였다. 얼마 되지 않았던 회원 수가 1년 만에 1만 명이 넘었다. 연령대도 20대, 30대, 40대가 대부분이었다.
그는 젊은 층이 많다는 데 착안해 그들의 고민을 상담해주고 진로를 코칭해주기 위한 집단 코칭도 진행했다. 한 번 모임을 하면 20~30명이 모이기 때문에 모임을 가진 카페 입장에서는 대환영이었다. 김 씨는 자신의 단체가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핸드 셰이크 캠페인을 벌였다. 회원들이 핸드폰에 핸드 셰이크 로고를 부착한 후 같은 로고가 붙어 있는 매장에서 물건을 사면 5% 할인해주는 혜택을 부여했다. 지역 커뮤니티와 지역 경제가 윈윈하는 결과를 낳으며 큰 호응을 얻었다.
김 씨는 정년퇴임 후 봉사활동만 한 것은 아니다. HR 전문회사에 입사해서 다양한 교육을 기획하고 강사로 일했다.
“군대에서 알았던 중령이 예편하고 그 회사를 다녔어요. 커리어 컨설턴트를 해주는 회사인데 제가 쌓은 경력과 딱 일치하더라고요.
대학에서 상담을 전공했고 사회복지사 자격증, 상담심리사 자격증, 평생교육사 자격증 등등이 있으니까요.
게다가 석사 이상만 입사자격이 있는데 제가 마침 아주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니까 입사가 가능했던 겁니다.
평생학습을 통해 다양한 라이선스를 갖게 되면 이처럼 기회가 생긴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력을 살려 제대 군인들의 재취업을 위한 평생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퇴직자들이 사회에 적응하기 쉽도록 도울 뿐 아니라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한 것이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SM인재개발 평생교육원을 설립해 군 제대자들의 학습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고 변화 관리의 필요성을 교육하는 데도 앞장섰다.
“자신을 연마하고 준비하면 기회가 끊임없이 옵니다.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더니 저의 경력을 보고 강연을 요청하기도 하고 신문사에서 글을 기고해달라는 요청도 옵니다.
그리고 방송 출연도 하게 돼서 동네에 다니면 사람들이 알아보고 인사도 해요.”
KBS 시니어 토크쇼 황금연못에 ‘배움에 대한 열정’이란 주제로 출연해 배우고 조건을 갖추니 기회가 왔고, 배움에는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설파했다. 그 후 여러 방송에서 강사, 기업컨설팅, 라이프 코치, 시인, 배우,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약하고 있다. 또한 학생, 기업, 군부대 등 다양한 기관에서 3만 회가 넘는 강연을 하는 스타강사이기도 하다. 7개의 자격증을 가진 그는 최근 요양보호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편찮으신 부모님을 직접 간병하기 위해서다.
“제게 평생학습이란 생명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마침표를 찍는 순간 죽는 거예요.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바로 배움이니까 평생학습이 제게는 생명으로 다가와요.
갈수록 사회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데 배우지 않으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제가 평생학습을 하면서 느낀 한 가지는 배움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김 씨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춰 국제 환경청년연합회의 수석자문위원을 맡았다고 밝혔다. 이젠 환경과 기술을 알아야 하고 ESG에 걸맞은 활동을 펼쳐야 한다며 또 다른 평생학습의 길로 들어서는 중이란다. ‘인생에 기회가 세 번 온다’는 말은 잘못됐다며 조건을 갖추고 준비해두면 수많은 기회가 오고 평생 청춘처럼 열정적으로 살 수 있다는 김상호 씨. 그의 다음 활약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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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평생학습e음 이선민 선임 에디터
사진 강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