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인천인재평생교육진흥원 원장 김월용_64살에 받은 박사 학위… 결핍이 가장 큰 에너지

2022-04-25

인천인재평생교육진흥원 김월용 원장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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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용

인천평생교육진흥원 원장




   ‘동네에서 제일 못 사는 집 소년'. 김월용 인천평생교육진흥원 원장(66)은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농사를 짓고, 고철을 주워 팔고, 아이스크림 행상을 했던 소년은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엉엉 울었다. 가난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더 배우고 공부를 하고'라는 대목을 듣는데 그렇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어머니가 저 중학교 보내려고 엄청 고생하셨거든요. 옆집 가서 학비 좀 빌려달라고… 그게 다 좌절되는 걸 저는 옆에서 다 봤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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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살 광부시절-21살 시절- 22살 시절


   탄광 광부에서 사업가, 교수, 대학 학장, 인천 평생교육을 책임지는 인천평생교육진흥원 원장까지. 끊임없이 공부하고 도전하며 경력을 전환해온 김월용 원장은 자신을 “평생교육의 최대 수혜자”라고 말한다. 

   50대 중반까지 초등학교 졸업이 최종 학력이었던 그는 56살에 중졸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해 같은 해 고졸 검정고시까지 합격하고, 이듬해 평생교육진흥원 독학사 제도를 활용해 1년 만에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정책학 석사를 거쳐 64살에 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 원장은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는 정말 어려웠는데 시작하는 순간 바다 갈리듯 길이 나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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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박사 받을 때


   지난해 6월 인천평생교육진흥원 신임 원장으로 취임한 김 원장은 “지금까지는 시민들이 평생교육을 어르신들을 위한 교육 또는 취미나 레저를 위한 교육 등 ‘그들만의 리그’라고 생각하는 측면이 있었다"면서 “급변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고 다양화된 사회와 공존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생애주기별 학습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평생교육이 시민의 삶과 좀 더 밀접하게 연결돼야 한다는 것이다. 

   4월 출범한 인천시민대학 시민라이프칼리지는 이러한 김 원장의 비전을 잘 보여준다. ‘생활 밀착형 교육 플랫폼’을 표방하는 시민라이프칼리지는 인천대, 인하대, 가천대 등 지역 8개 대학 캠퍼스를 인천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20대부터 80대까지 생애주기별로 실생활에 필요한 교육을 무료로 제공한다. 김 원장은 “옛날의 저처럼 대학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겠다고 생각했다”면서 “인적, 물적 인프라를 갖춘 대학은 시민교육에 최적화된 곳이라는 확신으로 시민대학을 구상했다”고 말했다.  


   4월 20일, 인천평생교육진흥원장실에서 김 원장을 만나 그의 ‘공부 연대기’를 들었다.





“못 배운 게 죄는 아니었지만”




   강원도 영월 산골, 지독하게 가난했던 7남매집 차남. 아픈 부모님을 도와 생계를 꾸리느라 김월용 원장은 어린 시절부터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직업을 경험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양복점에서 일하기도 했던 김 원장은 강원도 태백 탄광촌으로 떠난다. 그곳에서는 형이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나이가 어려서 처음에는 식료품 배달도 하고 생선 장사도 했어요. 그다음 탄광 기계를 탄광에 설치하는 일을 하다가 돈을 더 많이 준다고 해서 탄광에 세우는 갱목을 막장에 배달하는 일을 했죠. 동료들이 수없이 죽어나가고 저도 그때 손톱, 발톱 다 빠지고… 지금도 기관지 결절이 있어요. 그렇게 18살부터 8년 동안 꼬박 광산에서 광부로 일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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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원장은 자신을 광산에서 꺼내준 것이 어머니였다고 말했다.  


“스물여섯이 됐을 때, 한 해에 어머니 아버지 두 분 다 지병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때 어머니가 유언처럼 ‘너는 공부도 잘했는데, 니가 탄광에 있는 것이 안타깝다’고. ‘나 죽으면 이제 약 값도 안 드니 제발 탄광에서 나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이 가슴에 불도장처럼 찍혀 있었어요. 그 말씀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저는 탄광에 있었을지 모르죠. 어머니가 위암으로 돌아가신 지 한 달 만에 탄광에 사표를 내고 서울로 갔어요.”


   서울에 와서도 다양한 직업을 거친 김 원장은 초졸이라는 학력 때문에 설움을 겪기도 했다. 


“탄광촌에서 올라와 회사에 지원을 했는데 최종 학력 증명서를 꼭 내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초등학교 졸업 증명서를 냈더니 그쪽에서는 놀라죠. 그렇게 몇 번을 떨어져서 눈물 흘리면서 계단을 내려오던 게 생각나요. 그 후로도 사회에서는 끊임없이 ‘증'을 요구하더라고요. 그래도 원망하기보다는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만족하려 했어요. 늘 희망을 갖고 ‘나는 잘될 거다'라고 최면을 걸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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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이 겪었던 설움이 떠올라서일까. 김 원장은 지금도 누군가 만났을 때 나이가 몇 살인지, 어느 학교 나왔는지, 전공은 무엇인지 먼저 묻지 않는다고 한다. 30대 초반, 건설업 동업을 하며 사업에 뛰어든 김 원장은 대규모 스포츠 센터를 설립해 성공적으로 운영했다. 어린 시절 그토록 바라던 경제적 여유를 갖게 되자, 마음속에 오랫동안 품어왔던 꿈이 떠올랐다. 그의 나이 50대 중반이 되었을 때였다.  


“‘이제는 공부 한 번 해봐야 하지 않겠나’라는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모르잖아요.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애들은 제가 대학 졸업한 줄 알고 있었어요. 못 배운 게 죄는 아닌데 자랑할 만한 일은 또 아니더라고요. 아무리 똑똑하고 사업에 성공해도 정규 학력을 갖지 않으면 누구도 인정을 안 해주는 게 현실이었어요. 학력에 대한 이야기는 평생 잘 안 하고 살았어요.”





“잘 때도 이어폰 꽂고… 치열하게 공부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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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정고시에 대한 생각을 막연히 하고 있을 때 즈음, 김 원장은 운명처럼 조력자를 만나게 된다.  


“해외로 가족 패키지여행을 갔는데 선생님 그룹이 왔더라고요. 그중 한 선생님이 제 이야기를 듣더니 ‘당신 이야기하는 것 보니까 대졸자 못지않다'면서 ‘무조건 할 수 있다'고 공부를 하라고 하셨어요. 귀국 후 서점에 가서 검정고시 책이랑 필통을 사주시면서 필통에 ‘K. W. Y’라고 써주시더라고요.”


   당시 멘토가 되어주었던 선생님과는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연락하고 있다. 56살이었던 2011년에 공부를 시작한 김 원장은 그해 중졸 검정고시와 고졸 검정고시에 모두 합격한다. 그러자 새로운 꿈이 생겼다. 


“고졸이 평생 소원이었는데 막상 고졸이 되니까 대학이 가고 싶었어요. 서울에 있는 3개 대학에 시험을 쳐서 다 합격을 했는데 지금 대학에 들어가면 환갑에 졸업을 하겠더라고요(웃음). 찾아보니 국가평생교육진흥원에 독학학위제라고, 대학을 다니지 않더라도 혼자 공부하면서 학위를 취득할 수 있는 제도가 있더라고요. 4단계까지 합격을 해야 하는데 학점으로 인정되는 국가 기술 자격증 3개 취득까지 포함해서 1년 만에 155학점을 땄어요. 그때 스포츠 센터도 경영하고 인천시 교육특보 등 지역에서 여러 직책을 맡으면서 제일 바빴을 때였죠. 그래도 하고 싶어서 하는 공부니까 힘든 줄 모르고 했어요.”


   이후 김 원장은 대학원에 도전해 연세대 정책학 석사, 한세대 IT융합 박사 학위를 받는다. 8년 만에 중고등학교 졸업부터 박사 학위까지. 어떻게 가능했을까. 원동력이 궁금했다. 김 원장은 ‘절실함'을 수차례 강조했다. 


“저에게는 결핍이 굉장한 에너지가 됐어요. 저는 부족하니까 남들 잘 때 깨어있고, 남들 쉴 때 뛰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독학사 공부할 때 인터넷 강의를 듣는데 잘 때도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잤어요. 머리에 들어오라고요. 검정고시와 독학사 공부할 때는 치열하게 외우고 또 외웠어요. 기본서를 철저히 읽고 이해하려 했고요. 석사, 박사 공부할 때는 같이 학교 다니는 아들뻘 학생들한테 많이 배웠어요. 특히 박사 공부할 때 석사생들과 친하게 지냈죠. 저는 ‘내가 해봤는데, 내가 아는데’라는 말이 나를 망친다고 생각하고 그런 태도를 버리려 했어요. 어른으로서 선배로서 대우받으려 하지 않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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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사 공부 과정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영어였다. 이때 당시 대학생이었던 자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처음 자신의 학력을 밝힐 때만 해도 가족들의 반응이 걱정됐지만 끊임없이 노력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 아이들은 김 원장에게 “위대한 아버지”라며 응원을 보내줬다. 김 원장은 “목표가 너무 크면 사람이 불행해진다”면서 “처음부터 박사가 꿈이었다면 시작도 못했을 텐데 ‘꿈 넘어 꿈’으로 목표를 이뤘다"고 말했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는 김 원장의 인생을 다시 한번 바꿨다. 석사 공부를 시작하면서 김 원장은 스포츠센터 사업을 동업자에게 넘기고 사업가에서 교육가로 새로운 경력을 시작했다. 2015년부터 경인여대 외래교수로 강단에 섰고 2018년부터 3년간 폴리텍대 인천캠퍼스 학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멈추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쉴 새 없이 달려왔다는 김 원장에게 그럼에도 멈추고 싶었던 순간은 없었는지 물었다. 


“지난해 봄, 폴리텍대 인천캠퍼스 학장 퇴임하면서 이제는 쉬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2개월 동안 쉬면서 차도 SUV로 바꾸고, 제주 보름 살기도 해보고, 울진 앞바다 가서 멍 때리기도 하고요. 노는 것도 정말 열심히 놀았어요. 새벽 5시에 일어나고, 밤새 낚시하고. 아내가 당신은 왜 그렇게 극성스럽게 노냐고(웃음). 그러다 인천평생교육진흥원장 공모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어요. 제가 정말 잘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마지막으로 한 번 가보자 싶었죠.” 




“시민들의 공부 욕구, 이렇게 클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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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년 가까운 노력 끝에 지난 4월 인천시민대학 시민라이프칼리지가 출범했다. 12일 열린 출범식에는 8개 캠퍼스 대학 총장이 참석했다. 김 원장은 대학과의 네트워크 구축을 위해 적게는 3번, 많게는 10번까지 각 대학 총장을 직접 만나 설득 과정을 거쳤다. 


“인천에 16개 대학이 있는데 대학생 숫자는 인천 시민 30분의 1도 안 돼요. 대학의 좋은 인프라를 시민들에게 돌려주자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대학이 공공재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거죠. 예산 확보부터 시작해서 대학을 움직이는 것까지, 정말 쉽지 않았어요. 다들 어려울 거라고 했지만 무조건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치밀하게 추진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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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라이프칼리지는 대학별로 특성화된 교육을 제공한다. 의과대학이 있는 가천대에 건강 관리와 관련된 ‘치매예방을 위한 뇌 건강운동’, ‘내 관절이 아픈 이유, 근육에 주목하라’ 등의 강좌가 개설된 것이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두피 탈모 이야기(자라나라 모발모발)’, ‘내가 꿈꾸는 전원주택 집 짓기', ‘내 손 안의 오케스트라’, ‘스타트업 아이디어 개발’, ‘세계시민을 위한 경제학’ 등 실생활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강좌가 눈에 띈다. 

   김 원장은 시민들에게 설문조사를 통해 어떤 강좌를 듣고 싶은지 직접 신청을 받아 54개 강좌를 개설했다고 설명했다. 스포츠 센터 경영 경험을 살려, 아파트 단지 엘리베이터를 홍보 창구로 활용하는 등 평생교육이 시민들에게 보다 쉽게 가닿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기도 했다. 


“평생교육 강좌가 인기 없어서 폐강되는 경우도 많은데, 수강 신청 첫날 90%가 마감됐어요. 지금까지는 시험 쳐서 대학 가고 취업하려고 공부했다면, 이제는 내 삶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공부하고자 하는 욕구가 굉장히 높아진 거죠. 또 고령자들이 많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수강 신청자 중 80년대, 90년대생 비율이 높은 것도 놀랐어요. 이 세대들이 어딘가에서 배우고 싶고 소통하고 싶은 욕구가 그만큼 높은 거예요.”


   ‘생활 밀착형 교육’이라는 시민라이프칼리지의 콘셉트는 김 원장 개인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사실 제가 학위를 따면서 새롭게 알게 된 것은 그리 많지 않아요. 책에서 배운 것보다 더 도움이 된 건 삶에서 배운 것들이었어요. 어렸을 때 아버지가 제게 제일 먼저 가르쳐줬던 게 ‘이 나무는 베어도 되는 거야, 이 산나물은 캐서 먹어도 돼, 이 짐승은 독이 있어’ 같은 거였는데 이런 것들은 절대 잊히지 않더라고요. 제가 새롭게 만든 진흥원 비전이 ‘흥미롭게, 보람 있게, 가치있게’예요. 평생교육은 흥미로워야 한다, 보람 있어야 한다, 활용도가 있어야 한다는 거죠.”


   김 원장은 각 대학 시민라이프칼리지 개강식 날 총장들이 시민대학생들을 따뜻하게 환영해 주는 모습을 보면서 그간의 시간이 떠올라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대학이 시민 품으로 돌아가면서 시민은 대학의 인프라를 이용할 수 있고, 대학 역시 시민들이 갖고 있는 경험을 통해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시민이 직접 멘토와 강사가 되는 시민명장제도도 구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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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31조 

①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⑤ 국가는 평생교육을 진흥하여야 한다.



   “살기 위해 법률을 다 외웠다”는 김 원장은 인터뷰 도중 수차례 헌법 31조를 언급했다. 평생교육은 헌법에서 보장하는 권리이며,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것이다. 김 원장은 “그럼에도 평생교육에 투입되는 국가 예산이 여전히 너무 부족하다”면서 “20살 이전까지 교육도 물론 중요하지만 20살 이후 디지털 문해교육, 학력보완교육, 민주시민교육, 인문사회교육 등 시민들이 좀 더 폭넓게 평생교육을 활용할 수 있도록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면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제가 어렸을 때 동네에서 제일 부자였던 양조장, 금은방, 자전거포… 지금은 다 없어졌잖아요.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공부가 필요해요. 또 지금은 디지털 문맹이 큰 문제잖아요. 가짜 뉴스도 판별 못 하고 인터넷으로 은행, 쇼핑 이용하는 것도 어렵고 세대 간 갈등까지. 평생교육을 통한 발 빠른 대응이 필요하죠.”


   박사 학위라는 ‘증’을 딴 후에도 김 원장은 여전히 늘 공부한다는 자세로 살아가고 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바로 찾아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며, ‘모두가 스승’이라는 겸손한 자세로 누구에게든 배우려 한다. 이는 김 원장이 50대 중반 나이에 검정고시에 도전하기 전에도 계속해왔던 일이다. 김 원장은 “평생학습은 내가 직접 좌표를 찍고 스스로 찾아가는 공부"라면서 “저희는 내비게이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뷰 전날, 건강검진을 받고 탑골공원과 익선동을 돌아보면서 노인 세대와 젊은 세대의 문화를 배우려 했다는 김 원장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범위가 넓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동시에 ‘부지런히 더 배우고 공부를 하’는 자세는 평생에 걸쳐 필요하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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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홍현진

photographer 이민정

design 이해선